[칼럼] 쾌와 불쾌 사이

점성학 강의 시간에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점사를 보면서도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그 배치는 좋은가요, 나쁜가요?” “그거 좋은 건가요?”

이 말안에는 세상 만물에게 보편적으로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는 대답한다. 좋음 나쁨이 아니고, <나에게> 기쁨인가 고통인가의 문제라고. 쾌(快)는 기쁨이자 즐거움이며 삶의 긍정적 동력이다. 불쾌(不快)는 고통이며 좌절이며 삶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 장애물이다. 물론 이때 쾌와 불쾌는 말초적 즐거움 즉자적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쾌는 내세울 수 있는 가치 중 으뜸인 것이며 나아가게 하는 힘이자 감각이다. 불쾌는 회피하고 싶은 가치들이며 감각들이다.  

그런데 기쁨과 고통, 쾌와 불쾌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다. 나에게 기쁨이며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는 고통이자 나쁜 것일 수 있다. 같은 사물인데 나에겐 즐거움(쾌)의 대상이지만 누군가는 극히 싫어하는(불쾌) 대상일 수 있다. 나는 밝은 것이 좋은데 그는 어둠을 좋아한다. 나는 빨강을 좋아하나 그는 보라를 좋아한다. 아니 그는 빨강을 극혐한다. 이떄 빨강은 나에겐 좋은 것이요 그에겐 나쁜 것이다. 나에겐 아침 식전 찬물이 보약이지만 그에겐 독일 수 있다.

그뿐인가! 동일한 것에 대하여 어제는 쾌였으나 내일은 불쾌인 것이 우리의 삶이요 감각이요 감정이다. 작년에는 빨강이 좋았으나 올해는 빨강이 싫어지기도 한다. 어제는 그가 미치도록 좋았으나 오늘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수 있다. 10년 전에 나는 운동하는 사람을 경멸했으나 오늘의 나는 운동하는 사람을 존경할 수 있다. 20년 전 나에게는 돈이 최고의 기쁨이자 가치였으나 20년 후의 나는 돈보다는 지성이나 지혜가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오늘 나는 기름진 음식이 필요하지만 10년 후 나는 메마른 탄수화물 식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현재 ‘좋은 것’ 지금의 나에게 국한된 쾌를 진리처럼 떠받든다. 몰입한다. 추구한다. 우리의 욕망과 충동이 쾌와 연결되어 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 기뻐하며 즐거워할 일을 추구하고 몰입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고통과 장애를 피하고 싶으며, 아니 죽음이라는 최고의 불쾌를 피하고 싶어짐은 인지상정이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다면 나만의 쾌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나의 즐거움과 기쁨이 선 아닌가. 대부분에게 그러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마법사나 입문자조차 지금의 내 쾌를 충족시킬 ‘소망’을 빌고 실재화하려 한다.

문제는 쾌와 불쾌가 상대적이라는 데 있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동일한 주체의 시공간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이 격차는 지극히 모순적인데 우리가 다만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운명의 틀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며 사는 경우 이 괴리에 대해 알아차릴 필요는 없다. 이때 최고의 선은 나의 자기보존본능이며 그것이 우주의 존재 목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입문자, 마법사, 요기, 오컬티스트 등 나를 벗어나 이 세계 전체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심지어 신을 경외하는 종교인의 경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한다. <우주보편법칙>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가 나의 쾌와 불쾌 앞에 서기 때문이다. 세계와 만물을 관통하여 지배하는 <절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반성 또는 기도가 점차 변하게 된다. 우주보편법칙, 신의 뜻, 신의 의지가 나의 쾌와 일치하면 더없이 멋진 일이다. 그러나 아주 종종 이 둘은 어긋나곤 한다. 

이런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진보의 열정을 불태우는 자라면 나의 쾌를 물려야 한다. 단언컨대, 이 과정이 반복되면 점차 나의 쾌는 빛깔을 잃는다. 까르마의 충동과 욕망이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대신 신, 대우주, 보편의 쾌가 나의 쾌와 일치되어간다. 쾌만 그러한가? 아니다 불쾌 역시 나만의 상대적 특성을 잃는다.

입문자라면 이 경지에 이르기를 누구나 소망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아직 요원하지만, 오늘도 연습한다. 나의 쾌를 계산하는 대신, 우주보편법칙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 반성한다. 신의 뜻에 잠잠히 복종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보편이 추구하는 진리가 나의 쾌와 일치되는 날을 꿈꾸며! 변덕스러운 흐름 위에 <절대적 쾌>가 지배하게 되길 꿈꾸며!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S.S.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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