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컬트 유추

M. 엘리아데는 저서 <신화 꿈 신비>에서 여러 문명권에 널리 퍼져 있는 ‘세상의 나무’ (생명나무)라는 상징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징이 갖는 힘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나무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인간의 의식에 엄습하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총체적으로 ‘알게’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은 “어떤 특별한 대상이 우주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 경험은 영적 행위로 변환되고 더 활성화 된다.” 오컬트 학문에서 상징이 갖는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목이다.

어떻게 <나무> 라는 사물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표상할 수 있는가? 이때 나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라는 사물은 제한된 의미-지시의 틀을 깨고 다시 태어난다. 4극자석인 인간의 정신, 즉 의식-잠재의식이라는 한 쌍의 대립자가 ‘본질>관념>형상’의 창조-진화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유추 작업에 돌입함으로써, 하나의 상징 이미지를 총체성 안에서 재탄생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오컬트 유추 과정 속에서 모든 상징이 궁극적 실재로 환원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형상-충동이라는 이원성이 통합을 통해 어떻게 부분을 전체로 환원시키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탐구의 주요 목표다.

(1)상응의 원리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컬트 유추법이란 인간 안에 발현된 진정한 자연(본성)을 모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4극자석과 상응합니다.”

이 짧은 언명 안에 오컬트 유추의 모든 원리가 담겨 있다. 인간 안에 발현된 신의 본성(진정한 자연), 그리고 그것이 갖는 4극자석으로서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유추 능력을 납득할 수 없다. 따라서 우선 인간의 유추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4극자석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살펴 보겠다.


<헤르메티카>에는 (원형적)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다음, 신의 양극 분할과 그 형태화 양식 즉 7행성의 본질을 나눠 받고 창조자의 반열에 올라선 다음, 하위 자연과 결합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헤르메티카>는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실락, 즉 하위 자연과의 결합을 통해 4극자석이라는 ‘신의 형상’을 완성해 구현해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뉨과 통합을 반복하며 순환의 고리를 확장해 가는 창조 행위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음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 인간 즉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창조자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실락한 인간, 즉 말쿠트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 안에 하나의 ‘기억’으로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 안에 발현된 본성은, 세계를 창조했던 모든 기억, 펼쳐짐의 모든 과정을 응축해 가지고 있으며, 창조-진화의 모든 기억이 영-혼-육의 다양한 시스템 안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각 차원에서 그에 걸맞은 창조 행위를 반복-재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선험적 기억과 창조 행위의 모방을 통해 인간은 ‘기호 작업’을 한다. 언어 체계와 표현-해석-소통 능력은, 그것이 말이든 문자든 기호든 상징 언어든 막론하고 모두, 세계의 창조-진화 패턴을 모방하는 물화(物化) 작업이다. 또한 기호 또는 상징 이미지에 집중해 추상적 실재 즉 본질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은, 창조-진화 패턴의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탈물화(脫物化) 작업이다. 이 두 가지 패턴은 모두 두 번째 로고스에 해당한다. 두 번째 로고스는 신의 말씀(첫 번째 로고스)을 모방하여 재현하는 언어-문자-기호 체계를 말한다. <쎄페르 예찌라>는 바로 이것의 원리를 파헤치는 문헌이며, 카발라는 이 창조 행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진동의 학문이다. 물론, 상징 언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따라서 카발라는 우리가 오컬트 유추법의 구조와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상응법칙은 위의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카발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창조의 국면들을 살펴 보자. 아찔루트계(원형계 : 모든 모티프가 형성되는 국면), 브리야계(창조계 : 양극 분화를 통해 형상의 단초가 기획되는 국면), 예찌라계(형성계 : 충동과 제한의 작용을 통해 다양한 형상이 물화의 틀을 구성하는 국면), 앗시야계(작용계 : 예찌라계에서 만들어진 제한-형상의 틀이 다양하게 결합하여 시공간의 사건으로 구성되는 국면)는 모두 앞선 세계-국면의 모든 과정을 자신 안에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실락을 통해 완성한 4계의 마지막 존재 국면에는 앞선 모든 국면이 반영된 형태로 재현된다. 물론, 인간 자신은 그 모든 것의 집약물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짜로 마음을 먹으면, 이 모든 국면을 왕래하며 각 국면의 패턴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딱딱한 물질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인간의 다른 차원 즉 혼과 영은 각각이 속해 있는 세계 즉 아스트랄계(앗시야의 예찌라)와 멘탈계(앗시야의 브리야)의 자유로움에 놓여 있다. 이들 혼과 영의 활동은 육체가 물질계의 사건과 맞물려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순간에 시공간의 제한 속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각인된 ‘기억’은 시공간의 제한 속에 드러나는 국면을 잡아채어 그 연결선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상응법칙의 연결선이며, 우리는 각 차원의 상응성을 찾아내는 유추 작업을 통해 그 ‘기억’을 가동시킬 수 있다. 

결국, 오컬트 유추는, 상응법칙에 토대하여 인간의 영-혼-육이 벌이는 또 다른 창조 행위다. 우리는 이 창조 행위의 섬광 같은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재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의 일상 의식은 이 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대부분 무시한다. 유물론적인 현대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의도적인 유추 작업, 즉 모든 국면의 상응관계를 탐구하여 본질에 다가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각 국면의 상응성을 찾아냄으로써 전우주의 총체성에 다가설 수 있다. 우주에 가득한 신의 이름, 그 울림의 멜로디가 상응관계에 따라 수축의 경로를 흐르다가 ‘하나’로 환원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상징과 상응

그렇다면 상응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어떻게 어떤 형태로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층위도 다르고 밀도도 다른, 이것들과 저것들을 연결해 총체성을 획득할 것인가? 다이온 포춘은 <미스티컬 카발라>에서 상징 이미지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카발리스트들은 조금 다른 과정을 택한다. 그들은 정신에 형이상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추상적 실재의 정제된 공기 속으로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다. 대신 눈에 보이는 실재적인 기호에 집중하여 이 상징을 통해 추상적 실재를 표현한다.” (39쪽 06번)

이처럼 우리가 먼저 상징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상징은 자연의 언어입니다. 다양한 영상, 숫자, 색깔, 기호, 소리 등이 상징으로 이용됩니다. … 자연은 바로 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잠든 동안 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이지요. 카발라 생명나무는 탁월한 상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8쪽)

여기서 자연의 언어란 별빛,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시적 표현이 아니다. 매우 개념적인 카발라 용어로서, 1로부터 방출된 에너지의 진동이 형상화되어 영상(이미지), 색깔, 기호, 소리 등 제한된 스펙트럼으로 구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에너지의 진동이 우리의 일상적 인지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된 상태라는 말이다. 예찌라계 이후의 세계 즉 하위 자연의 세계에서 진동은 이처럼 일정한 형태를 띠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지구영역인 앗시야계에서 모든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발현된 우주의 각 국면들, 즉 각 계를 넘나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높은 진동, 분산되지 않은 고밀도 빛은, 우리의 일반적 상태에서 단계를 건너뛴 채 곧바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이온 포춘이 지적한 대로 “훈련받지 않은 지성(사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다.

따라서 순수 관념과 만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태를 띤 구체적 실재들이 연결되어 단계별 통일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학, 기호학, 심리학, 신화학 등의 오랜 연구 결과 안에 이 과정에 대한 실마리들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물론 헤르메스학과 카발라의 심오한 상징언어는 한꺼번에 그 구조 속으로 들여보내 준다. 각 국면 및 계의 단층에 뻗어 있는 형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첫’으로 환원시키는 충동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단계별로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인문학적 탐구와 오컬트 학문, 이 두 분야는 각각 오컬트 유추 과정의 구조를 구석구석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하게도, 이들 각 학문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며 따라서 시선이 꽂히는 면이 다르다.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우주의 다른 측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훑어가며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 하위 자연의 언어인 상징을 통해 어떻게 본질(추상적 실재, 관념)로 이동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열쇠다. 우리는 상징의 가치, 상징의 구조, 상징의 해석 및 의미화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지점들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상응성에 토대를 둔 상징이 발휘하는 역동적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징언어와 추상화-의미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체들을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호로서의 상징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로 하자.

(3) 기호의 구조와 상징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과 언어학의 성과들을 통합 정리하여 ‘기호현상’을 ‘기호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는데, 그의 ‘구조’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구조’에 비해 인간 정신의 운동성을 훨씬 잘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기표-기의>의 결합체로 파악한 언어학자들에게 언어는, 규약에 의해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제한된 기호였다. 이에 비해 상징 기호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의성(多意性)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코는 기호란 종류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쨌든 기호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에코는 그의 책 <기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미 과정의 한 요소로서 기호를 분류할 때 기호는 어쨌든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은 기호를 <다른 것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퍼스는 … <어떤 관계나 명목하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관계>는 기호가 그 대상의 전체를 가리키기보다는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저런 관점이나 특정한 실천적 사용의 관점에서 그것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46쪽)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를 위해”란 소통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전제된다. 그러나 범위를 더 넓힐 수도 있다.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한다는 것은, 힘 자체의 운동에 기인한다. 어떤 에너지가 운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후의 단계는 전 단계를 반영한다. 그렇지 않은 운동은 불가능하다. 이때, 전 단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는 한 지점에서 그 앞의 운동을 가리킬 때 “그것을 대신”하여 기호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을 대신하는 재현 방식은 ‘모방’이다. 그런데 대상 전체를 가리킬 수는 없다. 반영하는 지점에서 볼 때 반영의 모체는 전체이며 반영물은 결과이자 부분이므로,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에코가 이러한 개념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기호에 추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는 기호와 정신의 역동적 구조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에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인용한다. “기호는 결과의 명백한 전항(前項)이다. 아니면 이와 반대로, 유사한 결과들이 확인되는 경우, 기호는 전항의 결과이다. 결과가 확인될수록 기호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때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 의미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맥락’의 공유가 필요하다. 에코는 이것이 사회적 규약으로서의 코드 공유에 한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불문하고 코드가 공유되는 맥락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다. 원인-결과의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래밍된 창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것이 단순한 자극-반응이라면 ‘연상’의 형태로, 복잡한 지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추론’ 즉 유추의 형태로 ‘기억’을 끄집어내 창조-모방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기호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때 상징은 모두 기호라 부를 수 있다. 다시 에코의 인용을 재인용해 본다. “볼프(Wolff)는 기호를 <다른 것의 과거 또는 미래의 존재를 추론하게 하는 무엇>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스토아학파를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학자들은 기호를 <정당한 연결로 구성되어 결과를 밝혀낼 수 있는 명제>로 정의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수학에 반대하여>)” 또한 아바냐노Abbagnano의 <철학사전>을 인용하면서, “기호는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은 기호의 가능성은 기호의 구조에 기인한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기호 규정을 정리하기 위해, 기호의 구조에 대한 견해들을 크게 두 가지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해 보겠다. 그림1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처럼 하나의 기호(언어)가 이원적 항 즉 시니피앙(Sinifiant)-시니피에(Sinifié)로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소쉬르처럼 언어가 이 두 항의 결합체라고 파악할 수도 있다. 이 두 항은 형식–내용으로 이해된다. 그림2는 기호의 다의적 지시 구조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이다.

<그림1> / <그림2>


에코가 시니피앙(Sinifiant)과 시니피에(Sinifié)라는 기호 구조를 역동적으로 만든 핵심은, 기표=형식 / 기의=내용 이라는 <지시의 일방성> 도식을 벗어버린 데 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각각의 형태-실체를 갖는다. 이 두 항이 각각 자기 운동을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실재로 바뀐 것이다.

원래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기호는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표현)의 결합체다. 예컨대. <1>이라는 숫자는 시니피앙으로서 수 ‘하나’라는 시니피에를 지시하는 가장 단순한 기호다. 인간은 고도의 추상성, 즉 헤아림이라는 관념을 응축시켜 형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모방 과정을 거쳐 표현(형상)과 의미(힘)의 통합체인 실재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곧 두 번째 로고스로서, <말씀>의 모방-재현 작업의 의미다. 그런데 그림2의 구조에서는, 이때 일단 만들어진 기호의 이원적 항, 즉 기표-형상과 기의-힘은 각각 나름의 실체와 형태를 가진 독립된 실재가 된다. 그리하여 에코의 입장을 채택하는 경우, 기표는 나름의 다의적 변주를, 기의도 나름의 변주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다른 차원에서 지시하는 중첩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프란츠 바르돈이 지적한 것처럼, 영상 숫자 빛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다양하게 중첩되어 확장된다. 이것이 곧 세 번째 로고스이자 형상화를 거친 자연의 언어다.


(4) 다의성으로서의 상징

이처럼 기호는, 수학에서 사용하는 지시 부호(수학 부호)나 규약(합의)으로 제한되는 언어기호까지도 일의적이 아니라 다의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폐쇄된 하나의 틀(말하자면 수학이나 언어 사전) 안에서라면. 각 기호는 일의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난 다른 맥락에서 모든 기호는 다의적이다. 엄격하게 일의적인 수학 기호조차 그러하다. 오컬티스트들은 물론이고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하나의 수 체계에서 비롯된 하나의 <수-기호>가 얼마나 다양하게 형식과 의미를 확장해나가는지 알고 있다.

이처럼 기호가 의미를 확장해 다의적이 되도록 하는 메카니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우선 기호 즉 지시물이 지시하는 대상의 특성에 기인한다. 즉, 기호는 전항(前項) 즉 전 단계의 특정 측면을 가리키는 창조-모방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기호 표현과 기호 의미가 각각 형태와 실체를 가지고 전방위적으로 전항의 힘을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번째 로고스다. 또한 이 기호는 연상 또는 추론을 일으켜 창조-모방의 역방향으로 전항의 전체를 재구성하는 작업 도구로 쓰인다.

예를 들어, 물질 행성인 ‘금성’을 가리키는 <금성>이라는 단어는 물질 우주의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다. 천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라면, <금성>이라는 기호는 단 하나의 사물만 지칭하는 일의적 지시물이다. 그러나 맥락이 열리는 순간 <금성>이라는 기호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얹혀지기 일쑤다. 고대로부터 <금성>이라는 기호는, 그 찬란한 빛과 새벽과 저녁을 오가는 특이성 등 때문에 찬란한 사랑, 에로틱 등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점성학이나 연금술 등 오컬트 학문의 맥락에 편입되면, <금성>은 상위 계의 특정한 힘을 표상하는 상징물로 재탄생하여 전항, 즉 상위 계의 그 힘을 반영-모방하는 지시물이 된다. 물질 금성이 가진 속성이 전항의 그 힘(원인)과 부분적으로 상응하는(결과)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천문학 이전에 점성학에서 이 상응성을 고려해 창조-모방한 기호이므로, 그 유추 과정의 원천은 점성학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상응성이란 물론 소리나 모양의 모방을 포함하겠지만, 규범론적 언어학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형상의 모방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창조-모방의 초점은 원인적 차원의 힘이 운동을 통해 어떻게 나뉘고 결합하는지에 모아져 있다.)

그 이후 <금성>이라는 기호는 기의와 기표 차원에서 각각 독립적인 다의성을 확보했으며, 매우 단순한 도상적 기호에서부터 시적 상징, 종교적 상징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기의와 기표는 서로 중첩되며 상위 차원의 힘, 즉 전체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호는 부분이므로 전항의 그 힘 전체를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상화 과정을 거쳐 그 힘 전체를 유추할 수 있게 하며, 상응 목록이 쌓일수록 지시하는 ‘전체’의 ‘부분’도 확장될 터이다.

이와 같이 기호의 구조가 확장되는 경우, 모든 기호는 상징의 다른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아바탸노의 <철학사전>이 규정한 것처럼, “모든 사물과 사건”이 전항의 어떤 측면을 가리키는 지시물로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중세 스콜라 학파의 상징주의처럼 “우주는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은 사물이라는 기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을 매개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그래서 성서의 모든 사건과 기호를 “철저하게 일의적으로 읽어야 한다(토마스 아퀴나스)”고 결론 내린다면, 또는 범기호학의 주장처럼 “스스로를 의미하는 전체로서의 우주, 즉 만물 단위의 의미만이 지배한다(파졸리니)”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될 것이다.

(5) 정신의 구조와 상징

그러나 두 번째 로고스 즉 창조-모방 작업을 통해 기호-상징의 지위를 얻은 기호라 해도, 그것이 세 번째 로고스로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자연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해도, 어떤 맥락에 얹혀져 해석되지 않으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네 번째 로고스, 즉 해석 작업을 통해 유추하는 인간 정신이 여기 결부됨으로써 진정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츠 바르돈은 앞서 1장에서 인용한 구절을 통해 “오컬트 유추가 4극 자석과 상응”한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이렇게 엄청난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어떻게 인간은 기호를 만들 수 있으며, 기호를 해석할 수 있는가? 기호 특히 언어체계는 우리의 정신구조와 동일한가? 이 우주가 신의 말씀이자 언어의 표상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상징인가? 그렇다면 단일한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하는가? 그 해석은 우주에 가장 안정적인 하나의 합법칙성만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로크와 흄과 버클리를 거치면서 결국, “지각적 시니피에의 개념을 기호 현상의 결과로서 정의”할 수 있는가? (움베르트 에코, <기호> 222쪽)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헬레니즘 이후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식론과 언어학, 기호학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논쟁이 이루어진 문제다. 우리가 여기서 그 역사적 진행과정을 세세히 들여다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곳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학문적 탐구 여부와 상관 없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원시인에서 고대인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로서 인간 정신을 추상적 관념의 영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물론 아무런 추상화 작업 없이, 뜬금없이, 본질로 훌쩍 안내한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다.)

프로이트 이후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가 횡단되었고, 위에서 제기된 문제는 인식론이나 언어학 또는 기호학의 범주 밖에서 수많은 임상 실험을 거쳐 다른 차원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의 정신 즉 멘탈체가 의식-잠재의식의 양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둘의 상호작용에 대해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대 헤르메스학과 카발라 전통에서 명료하게 전개하고 있는 모티프(양극에 걸친 정신 작용)가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의 전통과 함께 심리학의 연구 결과로부터, 앞에서 제기된 기호 해석, 즉 역방향의 창조-모방 작업, 추상적 실재로의 의미화 작업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G.융은 <원형과 무의식> 31~32쪽에서 ‘2차적 주체’라는 명칭으로 당시만 해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던 잠재의식의 실체를 논증하고 있다. 이 논증은 잠재의식(무의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약 의식 내용이 에너지 손실에 따라 의식의 문턱 아래로 들어가서 무의식이 되고, 반대로 에너지 증가에 따라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가능하다면,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의식성이 되도록 해주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무의식적 과정은 문턱을 넘어서지 않아서 자아가 인지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융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무의식이란 의식의 억압에 의해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억압을 해소함으로써 해당 무의식이 에너지를 얻어 의식성을 획득하도록 하는 과정을 치료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융은, 우리의 정신은 원래 이차적 주체를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이는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융의 같은 책 다음 내용을 참고하자.

“그러나 무의식적 과정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고 문턱 아래의 이차적 주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즉, 가설에서는 의식성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양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 주체가 왜 문턱을 넘어서서 원래의 자아의식에 편입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다. … 이차적 주체의 존재는 억압 덕분이 아니며,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의 결과를 표현한다. …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의식화되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차적 주체도 자아의식에 영향을 주는데 다만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상징들’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그 표현이 썩 적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의식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우선 징후적symptomatisch(징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에 근거를 두는지 알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는 부호학적semiotisch(기호)이다.” (문장 중 징후, 기호 부분을 제외한 볼드체 부분은 인용자의 표기임. 이 표시는 번역어를 인용자의 의도에 따라 수정하기 위한 것으로, 징후적은 징후로, 부호학적은 기호로 수정함)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자아의식’과 ‘잠재된 이차적 의식’을 가르는 ‘문턱’ 개념이다. 융은 문턱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스펙트럼, 즉 도수 위에 특정 양태의 정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때 문턱은 각 정신양Psychoide의 경계다. 광도, 즉 스펙트럼 위에 있는 다중적 정신. 이것이 융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출발점이다. 헤르메스학이나 카발라를 공부하는 이에게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우리의 의식 위에 그리고 아래에 다중적인 양태의 정신들이 펼쳐져 있으며 이것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개념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물론 실제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융은 이 전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제시한다.

우선 융은 정신의 해리 현상이 별도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 관계’로서 자아 안에 통합되는 개념임을 강조한다.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자 동시에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면에서는 의식적이며 다른 면에서는 무의식적이다. 모든 모순이 그러하듯이, 위와 같은 사실도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여기에 있고 무의식은 저기에 있다는 식으로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히려 정신은 의식적-무의식적 전체성을 표현한다.” (<원형과 무의식> 63쪽)

경계를 가진 다른 양태이지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 둘은 하나의 다른 양태(모순적인)일 뿐 별개의 자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현상을 ‘자아의 양극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프란츠 바르돈이 명쾌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멘탈적 양극성은 능동적 즉 양(+)인 의식과 수동적 즉 음(-)인 잠재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전기적 흐름과 자기적 흐름이 멘탈 영역의 양극을 대표합니다.”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64쪽)


“생각하는 행위는 질이며 또한 양이기도 합니다.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능동적 영역인 일반적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수동적 영역으로 잠재의식 부분입니다. 의식과 잠재의식은 둘 다 생각하기의 질적 개념에 포함되며, 힘껏 노력하면 그 양이 증가하게 됩니다.” (같은 책 28쪽)


“자아의식은 멘탈계에서 영이 갖는 근본 속성으로, 우주 흙원소가 지닌 양태입니다. … 대뇌의 영역인 의식은 멘탈계와 멘탈체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5쪽)


“잠재의식은 우리의 모든 부정적 속성을 보여주는 거울로, 아스트랄체 안의 간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6쪽)

바르돈에 따르면, 우리 영, 즉 멘탈체의 외연을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가 ‘생각하기’의 주체인 의식이며, 이 의식의 반영인 다른 한쪽이 곧 잠재의식이다. 의식은 멘탈계(관념의 세계)에, 잠재의식은 아스트랄계(이미지-형상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양과 음이라는 한 쌍의 실재가 우리 자신이며, 능동적 또는 수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속성의 스펙트럼 위에 포진되어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결국 의식-잠재의식의 한 쌍은 우리의 영-혼-육을 오가며 자신을 드러내는 ‘자아의 양극성’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문턱’이 있다. ‘베일’이라고도 부르는 경계로서, 한 쌍이지만 다른 속성의 운동성을 갖는 각 에너지가 각자 나름의 운동을 할 수 있게 틀을 짓는 ‘매트릭스’다. 사실 흙 원소로서의 자아의식은, 이 매트릭스 자체이기도 하다. 이 매트릭스는 양의 흐름과 음의 흐름을 포괄하는, 말하자면 의식의 모순으로서 잠재의식까지 함께 포괄하는, 모든 운동의 총합이다. 동시에 양과 음의 운동하려는 충동에 따라 매개하고 전달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스펙트럼인가에서 감각을 통해 수용된 정보는 의식-잠재의식에 의해 포착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각각 독립적으로 자신의 운동 영역에서 포착하는 정보들(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을 수용한다. 물론 육체의 의식이 자리잡은 육체 대뇌에서는 시공간으로 제약된 정보를 수용한다. 그러나 아스트랄체 대뇌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정보를 수용한다. 멘탈체는 시공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정보를 수용한다. 잠재의식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이 수용되어 있으며, 이를 가리켜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앞서 상징이라는 기호가 ‘기표-기의’라는 이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은 실체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또한 이들이 서로 중첩되며 다의적으로 확장되는 모습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양극성으로서의 자아의식이 각자의 운동영역에서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며 처리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상징의 해석이라는, 진정한 네 번째 로고스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6) 해석과 환원
 
5장에서 융이 제시한 두 번째 주의해야 할 사항을 살펴 보자. 자아의식의 양극성, 즉 의식과 잠재의식의 상호교류에 대한 문제다. 우리 의식에 포착되는 잠재의식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근거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징조”의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상징 기호”다. 자아의식에 자신의 내용을 드러내는 잠재의식의 형태는 이 둘 중 하나다. 움베르트 에코가 지적했듯이, 징조는 단순한 자극일 뿐으로, 일정한 “연상”작용을 가능하게 할 뿐 해석 과정을 포함하지 않는다. 징조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채 “주관적으로 인식된” 내용이다. 완전한 의식화 과정은 의미와 근거를 알거나 안다고 추정되는 한에서 ‘상징’이라는 기호를 “유추”하는 작업을 통해 일어난다. 꿈에 드러난 잠재의식의 내용은 징조일 뿐, 해석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유추하고, 완전한 의식의 영역에 그 내용을 포괄할 때 기호-상징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은, 의식-잠재의식 즉 양극성(모순)의 통합원리에 걸쳐 있는 자아의식의 작업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예찌라계라는 형상의 세계에 얹혀 있는 의식의 작업 영역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상징은 자연의 언어, 즉 형상의 세계에 속한 힘의 형태다. 따라서 이미지라고 일괄해 표현하는데, 이때의 이미지란 이마고imago, 즉 모방-재현된 형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르돈이 지적했듯이, 영상, 리듬, 숫자,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모두 이마고로서의 상징이다. 힘의 진동이 형상을 입고 드러난 형태들인 것이다. 이 또한 이원항의 결합체로서 기표(실체와 형태)-기의(형태와 실체)의 양극성이 결합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때의 양극성은 관념의 세계나 가장 근원적인 첫 힘의 양극성과는 다른 존재 양식으로 드러난다. 형상의 세계인 예찌라계에 드러난 힘은 자웅동체(암수한몸)가 아니라 양성구유(어지자지)인 것이다. 세계의 ‘첫’인 단일자, 즉 신은 자웅동체로서, 모든 양(남성성, 충동으로서의 힘)과 모든 음(여성성, 충동을 제한하여 형상화하는 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힘이 분화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형상을 입게 될 때, 여기 반영-재현되는 힘은 분화되었던 자신의 극성을 그대로 가진 채 포괄된다. 양성구유가 그것이다. 예찌라계의 양성구유적인 존재양식은 네짜흐와 호드, 그리고 예소드로 표현된다. 다이온 포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네짜흐와 호드)은 하위 차원의 힘과 형상을 대표한다. 네짜흐는 자신들이 낳은 본능과 감정을 나타내며, 호드는 구체화된 정신을 나타낸다. 대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둘은 힘이 형상으로 구체화되는 두 가지 단계를 나타낸다. 네짜흐에서 힘은 아직 비교적 자유로운 운동을 유지하고 있다. 극도로 유동적인 상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 정도로만 묶여 있다. 그러나 호드에서 힘은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일정하고 영구적인 형상을 띠게 된다.  … 네짜흐에서 모든 정신은 집단정신으로서만 존재하지만 호드에서는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 시작된다.” (미스티컬 카발라> 324쪽)

“예소드는 정신과 물질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고유한 실체의 영역이다.” (같은 책 364쪽, 368쪽)

네짜흐와 호드에서 우리의 정신, 의식-잠재의식, 특히 예찌라계와 동일 스펙트럼을 지닌 아스트랄체(혼)이 자연의 힘에 작용한다. 여기서 이미지를 만드는 인간 정신은 “아스트랄 빛이 형상을 띠고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감각할 수 있는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속적 형상으로서 개념화 작업이 나타난다. 예소드의 존재 양식이라는 스펙트럼에 위치한 우리의 혼은 이 이미지를 실체 경험 사물과 연결한다.”


사실 힘-충동인 네짜흐의 존재양식과 형상-틀인 호드의 존재양식은 서로 겹쳐져 극성의 넘나들이가 빈번한 상태로 존재한다. 다이온 포춘은 특히 실천적 측면에서 힘은 호드에서 네짜흐로, 네짜흐에서 호드로 흘러들어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소드는 물질과 정신의 넘나들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존재 양식이다. 바로 여기, 기호-상징의 확장과 해석, 유추 작업의 가능성이 있다. 예찌라계, 그리고 예소드의 매개에 의해 앗시야계에 걸쳐, 기호 자체의 양극성과 우리 정신의 양극성이 상호작용하는 작업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3장의 그림2를 통해 기호가 다중적 확장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살펴 보았다. 자연의 언어인 상징은, 네짜흐 호드 예소드 라는 하위 자연의 존재양식 중 어느 특정한 스펙트럼에 놓여 있다. 그것이 기표의 형태다. 예컨대 숫자는 호드의 스펙트럼에, 리듬은 네짜흐의 스펙트럼에, 사물은 예소드의 스펙트럼에 얹혀 있다. 상응법칙에 따라 이 기호를 만든 누군가는, 이 기호가 가리키는 추상적 실재, 즉 관념의 세계에 배속된 본질과 기호의 동질성을 발견한다. 이 작업은 그의 잠재의식이 기의의 실체와 교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기의의 형태(파동)를 인지하고 기표의 실체와 연결하는 작업은 기호 생산자의 의식화 과정이다. 그의 의식은 기표와 기의를 연결함으로써 양성구유인 특정 기호-상징을 생산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세 번째 로고스 작업인데, 기호 생산자의 임의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로고스라는 규칙에 따른다. 이것이 수체계, 언어체계, 상징체계 등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이 체계는 원형의 세계, 모든것의 모티프가 만들어진 아찔루트계의 분화-통합 모델을 모방한 것이다.

우리의 유추 작업은, 이 과정을 거꾸로 모방 재현한다. 다이온 포춘은 이 과정을 “상징에 정신을 집중하면, 바로 그 힘과 접촉하게 된다”고 묘사한다. “바닷물이 통로를 따라 호수로 쏟아져 들어오”듯, 우리 의식과 우주의 잠재의식 사이에, 그리고 우주의 의식과 우리의 잠재의식 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융의 ‘원형적 무의식’은 이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단순 모방에 그친다면, 이를 네 번쨰 로고스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의식-잠재의식의 작용에 따라 기의의 확장은 물론이고 기표의 확장이 이어진다. 우리 안에 프로그래밍된 창조자의 힘이 파생을 거듭하며 창조를 재현하는 셈이다. 잠재의식은 수용된 정보를 바탕으로 기의-기표의 확장을 이어나가며, 의식은 이 둘을 개념화하며 연결시킨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 로고스는 기표-기의의 통합 작업을 통해 ‘관념화’ 과정에 들어선다. 이것이곧 ‘완전한 해석’이며 본질과 만나는 과정이다. 우리 의식-잠재의식, 즉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정신은 예찌라계에 얹혀 있는 작업과정을 거쳐 그것이 표상하는 본질-개념을 도출한다. 또 다른 차원의 의식화 과정인 셈이다. 형상화된 잠재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 말이다.

문제는 잠재의식이 포착해서 축적하는 내용들을 어떻게 의식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훈련을 통해 잠재의식을 통제함으로써 잠재의식의 내용들을 관념의 창고에 배속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인 유추 작업을 통해 그 통로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조언한다.

훈련은 지난하지만, 일단 상응성을 파악하는 유추 작업의 파일이 쌓이면, 그리고 “하나를 통해 근원으로 환원시켜 같은 속성끼리 분류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섬광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상징으로 본질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오컬트 유추법의 핵심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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