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인의 운명에서 집단 까르마의 비중은?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다를 보지 못했다.”
영화 <관상>에서 회한에 사무친 관상쟁이가 한 말입니다. 여기서 파도는 한 개인의 까르마요 운명이며, 바다는 시대정신이며 역사이며 집단 까르마입니다. 파도에 골몰하는 것은, 운명을 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지요. 이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까르마와 운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까르마는 원인과 결과라는 아주 단순한 우주보편법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나’ 라는 개인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마찬가지죠. 따라서 한 존재에게 적용되는 까르마는 존재의 여러 층위에 걸쳐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운명입니다.

C.G.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식-무의식의 2개 층 이외에도, 이 둘에 얽혀 있는, 주체의 여러 가지 측면을 논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본능, 충동, 욕망, 이성, 의지, 기억, 정신양, 그리고 원형 등등.
까발라 학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이 문제를 논했습니다. 까발라에서 탐구하는 주체의 열가지 측면은, ‘위대한 정신’과 수동적인 통찰(선천적 잠재력)과 능동적인 의지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원형’의 영역입니다. 원형은 누미노제, 즉 신의 영역입니다. 이미 원형의 영역으로부터 의지와 통찰이라는 양과 음의 영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림1> 의식의 측면들

우리의 까르마에는 겹겹의 베일이 존재합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주체 의식의 여러 측면들은 겹겹의 베일을 포함하는 깊이를 갖습니다. 복잡하지요? 결국, ‘나’ 라는 개별자는 이렇게 수평 수직으로 쪼개어 보면 몇 가지 에너지 덩어리들이 얽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몇 개의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점성학 천궁도에 표시되는 7행성입니다. 주체의 일곱 측면! 나머지 셋은 위대한 영, 세계혼, 전체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 덩어리들은 수직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드러나는 것과 잠겨있는 것, 즉 다시 양과 음의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중 가장 밑바닥은 원형과 맞닿아 있습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그 어떤 개별자의 경우를 막론하고, 선천적이며 집단적입니다. 집단의 경험이 기록된 창고 섹션인 셈입니다. 이 섹션들은 서로 얽혀 힘을 주고 받으며, 한 개별자의 여러 가지 본성과 충동을 결정합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상층부로 갈수록 개별적이고 후천적이며 표피적인 경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한 개체의 표면 상으로는 이 영역이 전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표면이야말로, 흙으로서 자기보존본능을 갖는, 영적 자아가 경험을 계속하게 만드는 윤회의 근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때문에 영적 자아 개체들은 윤회를 거듭해야만 합니까? 경험의 기록-흔적들은 끊임없이 축적되어만 가는데, 그 끝은 어디입니까? 왜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 회귀, 해탈을 삶의 목표로 삼을 만큼, 이 반복을 괴로워 하겠습니까?
하나, 즉 신으로부터 나뉘어진 개체는 확장-진화하는 신의 부분입니다. 우리 세계 전체는 확장-진화만 합니다. 부분은 퇴보와 진보, 확장과 수축을 거듭하지만, 전체는 확장만 합니다. 마치 파도와 바다 전체처럼 말입니다. 모든 개체, 즉 부분이 운동하며 확장-수축하며 진화-퇴보하며 경험한 흔적은, 전체가 확장-진화하는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요가 수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여지는 대상(현상세계)은 오로지 보는 자(신) 자신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목적을 위해 모든 개체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인 주인공이 그것을 보고 그로 인해 해탈에 이르고자” 스스로를 나누고 고정화하여 개체를 창조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 글의 목적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자 이제, 이른바 집단 까르마와 개별 까르마가 한 개체에게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명사 ‘새’는, 그 나름의 본성과 충동의 공통점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새가 실체입니까? 아닙니다. 개념입니다. 그러나 개념적 실체입니다. 까치와 까마귀, 독수리와 참새는 어떻습니까? 개념에서 실체로, 추상에서 구체로 조금 더 나아간 개념 집단입니다. 
추상적일수록, 개념적 집단일수록, 그것은 영적 자아와 가깝습니다. 선천적이며 집단적인, 한 개체의 본성과 충동을 좌우하는 전체입니다.
제 아무리 잘 난 새도, 새라는 개념적 실체 범주에 있다면, 날개와 이러저러한 본성과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는 집단의 축적된 경험이 한 마리의 새의 본성을 좌우합니다. 까치 까마귀 독수리 참새라는 개념적 집단에 이르면 본성과 습성은 더 구체화됩니다. 참새라도 조금 더 구체적인 종으로 나뉘어집니다. 환경에 적응하며 습득한 종의 습성은 유전됩니다. 모든 경험의 기록-흔적이 대를 거듭하며 그대로 적용되니까요. 주체의 층위 중에서 그 모든 경험-흔적을 기록하는 주체의 층취를 영적 자아, 멘탈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조금 더 복잡할 뿐,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화가 진행된 집단, 그 마지막 고리인 인간에게는 ‘의지’와 ‘심상화’ 라는 영역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내 운명의 표면은 그 모든 것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그 표면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품은 흙이며 윤회의 근거입니다. 나의 개별 까르마는, 내가 속한 개념적 실체로부터 구체적 개별자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 까르마를 표출하는 표면입니다.

그런데 집단과 개체는 별도의 실체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까지 간파했던, 바로 그 ‘전체와 부분’의 관계입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정언을 기억하시죠? 부분인 개별 까르마의 거대한 밑바닥엔 집단 까르마가 잠겨 있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편 추상적 실체인 한 집단의 집단 까르마는, 부분들 즉 속해 있는 개체의 경험을 통해 운동합니다. 경험들의 양이 쌓이면 양질전환을 통해 변성합니다. 즉 진화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진화 단계이며, 역사의 시대정신이고, 신의 측면입니다.

개별 까르마는 집단 까르마와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는 집단 까르마가 존재 방식에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 세계는 집단에서 개체로의 진화 일로에 있습니다만, 특히 인간이라는 개념적 집단에게서는 더욱 더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만, 그렇다고 거대한 집단 까르마보다 개별 까르마의 영향력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같은 시공간을 점한 동시대의 개체들은, 속해 있는 집단의 집단 까르마에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점을 볼 때 파도에 골몰하는 경우, 특히 표면의 정지된 형상에 집중하는 경우, 진짜 운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수직과 수평으로 짜여진 겹겹의 스펙트럼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화의 향방과 시대정신, 역사의 흐름은 물론이며, 개체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집단의 까르마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본성과 충동의 퀄리티, 즉 내용이 좌우되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동일한 천궁도를 가졌다 해도, 전쟁 상태의 시공간에 태어난 사람과 평화 상태에서 사는 사람의 퀄리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힐렉의 상태가 같다 해도 수명의 결정력은 집단 까르마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같은 상태의 천궁도라 해도, 일본인의 운명과 한국인의 운명은 색깔이 다릅니다. 충동의 색깔, 자극-반응의 메카니즘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추상적 실체,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특수’의 모순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성학은 단순한 공식으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닙니다.
겹겹의 베일을 가진 인간, 자연, 신, 세계의 본성과 운동 방식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학문입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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