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 위에서, 패쓰워킹

<카발라Ⅲ : 경로> 개강 강좌를 준비하며

​네 길을 가라, 길을 찾다, 길을 열다, 길이 열리다, 길이 닿다, 길을 트다, 길을 닦다, 길 위에 서다, 길을 알면 앞서 가라, 갈 길이 멀다, 극락 길 두고 지옥 길 간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 저승 길, 헤어날 길, 살 길, 험한 길, 한 길…

‘경로’라고 하면 뭔가 어렵고 심오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우리는 ‘경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우리말로 ‘길’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 걷거나 차로 이동하거나 수레나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것을 길이라 합니다. 목적지까지 이어져 있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많은 것들의 이동 변화 운동 스토리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길’이 완성됩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길은 점점 닫히고 쇠락하여 더 이상 길이 아니게 됩니다.

물질적 공간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즉 감성적·정신적 영역에도 길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오컬티즘에서 ‘길’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무게를 갖습니다. 왜냐 하면…

위에 나열한 ‘길’들은 삶의 대목마다 실재화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누군가 이미 닦아 놓은 것이 대부분이죠. 우리는 찾고 발견하여 목적지까지 걷거나 달립니다. 물론 새로 길을 내고 닦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개척자들이지요. 오컬티즘에서는 이와 같이 새로 길을 닦거나, 생경한 샛길을 다듬고 표지판을 설치하여 번듯하고 편리한 길로 만드는 개척자들을 구루, 현자, 스승, 성인 등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완벽한 새 길’을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방출’과 ‘창조’의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흔적은 한 점 한 획도 사라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지혜의 스승들은 그 창조의 경로를 되짚어 길을 개척할 따름입니다. 자연의 지형을 따라 물질계의 길이 난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 영이 다른 것, 이왕이면 상위 차원의 힘이나 시공간에 닿기 위해서는 창조의 기록, 방출의 경로를 따라가야 합니다.

물론 크고 번듯한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험준하고 좁은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오직 까르마 인과법칙에 따라 목표를 선택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체계(God system)를 선택하는 것이 입문의 가장 중요한 기로라고 마스터 바르돈이 강조하잖아요? (헤르메스학입문)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리고 먼저 가 본 자, 즉 스승은 그 길을 안내하고 살펴 줍니다. 수호자는 적합한 체계를 선택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승은 체계의 정해진 경로를 따라 제자의 대목대목 입문을 안내합니다.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대신 가줄 수는 없지만,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그리고 기로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내합니다. 먼저 가본 자들은 뒤따를 자들을 위해 표지판도 세우고 안내자를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가로놓인 ‘관문’을 열고 들어서게 하는 겁니다. 이것을 입문이라 하지요. 입문에서 스승은 그 길의 본디 형상, 즉 에너지 속성을 경험하게 하고 그 경로의 모든 힘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흔히 말하는 ‘패쓰워킹’은 이와 같은 <에너지 경험> 작업입니다. 원래의 경로는 방출의 흔적에 따라 생긴 지형지물일 것이에요. 스승들은 길을 넓히고 이미지화하였으며 힘을 세련되게 다듬어 놓기도 했고 표지판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습니다. 표지판은 해당 힘과 상응하는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패쓰워킹 기법도 남겨 놓았습니다. 꿈 작업, 이미지네이션, 명상을 통한 내면화 작업,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작업, 투사 등등. 어찌 됐든 힘의 표출물을 지각-경험하는 모든 방법이 동원됩니다.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내면으로 들어가든, 영화 <애드 아스트로>에서처럼 외재화 작업을 행하든, 동일한 지각-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무의식 저변은 온우주가 공유하는 공동의 창고이니까요. 아무튼 모든 패쓰워킹은 안내하는 스승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 길이나 우왕좌왕 다녀볼 수는 있지만, 헤매고 싶지 않다면 제대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다면 지도나 안내자는 필수적입니다. 게다가 이미 들어선 길에서 경험하고 행동한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는 이쯤 하여 끝!

사실 모든 경로는 입문을 통하여 그 힘을 경험-지각한 이후부터, 삶의 경로 자체가 됩니다. 그 힘을 온전히 알기 위해 집중적으로 그 진동에 노출되어 경험할 수 있도록 온우주가 배려하는 것이지요. 그 길을 설계하여 내어준 주인, 신체계가 마구마구 지원합니다. 만나게 되는 책, 만나게 되는 사람, 쾌와 불쾌의 모든 사건들, 끌리는 음식과 색깔. 몇 번의 의도된 ‘패쓰워킹’으로는 절대 온전히 그 힘을 알 수 없겠지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며, 이를 기반으로 행위의 방향을 선택하니 말입니다.

카발라 22경로는 존재양식이자 먼데인 에너지 센터 <세피로트>로 모이고 흩어지며 방출의 경로를 경험할 수 있게 열어 줍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방출-창조의 흔적, 그 길의 특징, 이어지는 목적지들, 길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각 가능한 표지들. ‘카발라’라는 지도 위에 이들 기호가 있습니다. 카발라를 공부하는 목적은 이들 기호를 완전히 습득하여 지도를 손에 쥐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집필 중인 <카발라강좌(가제)>에서 한 대목을 발췌합니다.


카발라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는 서슴없이 ‘로고스’라 할 것이다. 첫째 통합원리이자 법칙으로서의 로고스이며, 둘째 법칙에 따라 힘을 방출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이며, 셋째 방출된 힘의 실재화로서의 로고스이며, 넷째 실재화된 힘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로고스이다. 태초의 말씀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로고스다. 인간의 선험적 지성 즉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는 넷째에 해당된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이와 같이 로고스라는 통합체계를 통해 매개된다.

​결국 로고스로서의 카발라는 테우르기아Theurgia 즉 신학이며, 대우주에 존재하는 힘의 계열과 질서를 파악하는 우주론이며, 현존하는 실재 즉 끝없이 변화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만물의 존재론이며, 대우주와 소우주의 매개원리를 통해 신과 합일하고자 하는 진보시스템이다.

(중략)

구약성서 창세기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따라 빛이 생겨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 즉 영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함으로써 성취된 결과물, 다시 말해 힘의 방출과 운동의 결과물이 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며 실재한다. 에너지의 실체로서 빛이 실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운동과 변화는 한 획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전우주의 존재양식이다. 자연과 인간도 그 운동의 일부요 그 기록의 하나다. 이를 탐구하는 것이 존재론으로서의 카발라다.

​소우주인 나 자신의 안팎이 모두 그와 같이 이루어졌다. 이 거시적인 세계 속에서 지금 나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나 자신이 대우주 창조-진화의 모든 과정 모든 국면 모든 순간인 것이다. 그 시간과 공간이 나임을 온전히 자각할 때 이를 가리켜 ‘합일’이라 한다. 합일을 향한 길paths 즉 체계가 곧 카발라다. 만일 세계의 펼쳐짐, 그 모든 과정, 전체로서의 원인, 그것과 하나되는 ‘나’가 없다면, 그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카발라라는 학문은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다. 구전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무릎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하여 목소리에 핵심을 담은 채 지금까지 전해져 왔을 리가 없다.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희열을 느낄 때까지 다듬고 다듬는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의 안팎이 원초적 힘과 하나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카발라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카발라강좌(가제)> 정은주 집필 중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Silver Spring’ 칼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