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법생활백서 : 수정구, 스크라잉편

마법생활백서: 수정구, 스크라잉편

A. 맑고 투명한 수정구. 어디, 어디, 쓸까요?


■ 원격 투시, 전생-현생-후생 보기, 병자 치료, 사이킥능력 강화, 멘탈-아스트랄 파스워킹, 정령-요정 세계 입구, 마법사 영혼육 감각 훈련, 에너지볼트-충전, 생명에너지 저장, 마법사 메신져, 신과 교통, 엔터티 소환, 아캬사-점 보기, 공간 충전 및 공간 방어, 리추얼 및 마법능력 보조도구, 자연합일-명상도구 등.


B. 맑고 투명한 수정구. 어찌, 어찌, 쓸까요?

1) 눈알, 힘 빼기!


시선은 수정구에 두세요. 가만히, 이완하세요.

처음부터 수정구와 눈알을 기대하지 말아요! 가만히 먼산을 보세요.

※ 작업 前 전깃불을 꺼야 해요. 양초는 사용하지 말아요. 수정구 정화세척 잊지 말아요.

※ 먼산, 그러나 수정구를 응시하셔야 합니다.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세요.

2) 멋부리지 말고, 이완하세요!

수정구 가운데 마음의 먼산을 유지하세요.

목과 어깨에 힘을 빼고 완전히 이완-트랜스를 유지하세요.

눈은 수정구 저 멀리, 저 세계 끝까지, 아캬사 벽까지 달려갈 거예요.

※ 집중이 어려운 분은 향을 사용하세요. ‘샌달우드’나 ‘자스민’을 추천합니다.

※ 좀 더 강력한 투시를 원하는 분께는 ‘시나몬 향’과 ‘머스크 향’을 추천합니다.

3) 미친 소리 말고, 집중하세요!

수정구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빛-입자가 보입니다.

스크라잉-초심자라면 ‘고요히’ 관찰할 일입니다. 여기 빛-입자는 일종의 ‘통과의례’입니다.

눈알이 아파도 버터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써 해석하지 마십시오.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호들갑 떨며 정령이다, 인류의 종말이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 위 단계서 뜨라따까 유사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 눈알-촛점을 수정구 한 점에 두고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이 기상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4) 보이세요? 놀라지 말아요.

수정구 가운데 빛-입자가 들숨과 날숨으로 꽃처럼 피어나고

오색 연기와 뭉게구름이 눈앞을 가득 채우며 넘실대도! 절대 놀라지 말아요!   

※ 놀라서 집중이 깨지면 스크라잉 작업 역시 깨집니다. 열과 성을 다해 집중하세요.

※ 여기 빛-입자와 뭉게구름이 ‘한 점-한 형상’이 될 때까지, 인내하셔야 합니다. 기다리세요.

5) 들리세요? 들숨-트랜스를 유지하세요.

물러섬, 의식이 완전히 뒤로 밀려나면! 바로 스크라잉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의 목적을 기억하세요. ‘占’입니까? 아니면 ‘사이킥비전’입니까?

마음 깊이 최고의 섭리-신과 수호자에게 도움을 재차 청하고 스크라잉을 즐기면 됩니다.

※ 멘탈-아스트랄 프로젝션의 경우 ‘거쳐왔던 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 프로젝션 후 집으로 돌아갈 길이 헛갈리는 경우, 매트릭스와 은선을 기억하고 집중하세요.

※ 아카샤기록 및 영존재의 도움을 받은 경우, 반드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매너입니다.

6) 스크라잉-자신감은 오직 훈련 뿐입니다.

수정구-스크라잉은 오감을 만족하는, 사이킥-직관의 도구입니다.

특히 스크라잉을 하며 점-상담을 하는 분은 멀티-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사례자의 숨가쁜 질문공세가 여러분의 집중력을 공격할 겁니다.

집중이 깨짐과 동시에 점-사이킥은 혼선될 것입니다.

정말 큰일이겠죠? 그러니까, 의식의 멀티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 멀티-훈련의 비결은 바로 ‘사고통제’입니다.

※ ‘사고통제’는 <헤르메스학 입문>을 참고하세요. 

7) 수정구 관리, 어렵지 않아요.

수정구 세척은 흐르는 물이 제일입니다.

흐르는 물은 바닷물도 좋고 임진강물도 좋습니다. 그러나 ‘수돗물’이 제일입니다.   

리추얼 및 병자 치료 작업 후 수정구는 꼼꼼히 ‘세척-정화’해야 합니다. 세제를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정화 방법은 각자 따르는 마법체계를 따르는 것이 제일입니다. 섭리는 그렇게 작동합니다. 

※ 공간 정화용 및 충전용 수정구가 아닌 이상 수정구는 비입문자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습니다.

※ 비입문자가 수정구와 접촉했는 경우, 성내지 말고  세척 및 정화하면 될 것입니다.

※ 수정구 보관 시 실크-천을 사용하세요. 실크는 사이킥 절연효과에 그만입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연금술: 어버이 이름들

어버이 이름들(1)

알케미/알케미아/알쉬미/알씨미, 연금술이 말하는 어버이 이름들. 들어봤는가? 태양과 달, 장미와 백합, 낮과 밤, 사자와 독수리, 붉은 것과 푸른 것,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과 사라, 왕과 여왕, 창과 방패 … 등. 바로 저 이름들이! 저 개념들이! 그 시절, 르네쌍스 알쉬미스트들의 여린 눈알을 파먹은 것이다. “꽥꽥” 같은 날, 같은 시간, 저 어버이 이름을 쪼아댄 밀라노 연금술 입문자들의 비명이다. 학생들의 배창시를 보라. 흑사와 백사의 뒤틀림. 그러니까, 창자와 한데 꼬인 것이다. 짜릿하겠지. 혈액순환장애다. 

어버이 이름들(2)

어버이 이름들. 마치 수쉼나나디 가운데 이다와 삥갈라 개념의 나열 같은, 그 이원론적 표상들. 지독하다. 그렇게 연금술은 눈 먼 자들의 기대, ‘금’에 대한 욕망을 단번에 박살낸 것이다. 그러나 ‘참-빛’, ‘참-진보’를 열망하는 그대. 포기 마라. 연금술의 빛은 우리와 몹시 가까운 것이다. 그래, 찾기 쉽다. 거기 있다. 다만, 낮밤을 가르는 상징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상징언어-사용능력은 우리 오컬트학문의 필수조건이다. 어버이 이름들? 왕의 기예, 마기의 지혜, 연금술의 통과의례겠다.  

어버이 이름들(3)

결국 어버이 이름은, 각 계에 드러난 존재양태 및 변성상태를 말한다. 어제 ‘아버지-태양/어머니-달’이, 내일 ‘아버지-달/어머니-태양’이 된다. 한 달 후 ‘노인-태양/꼬마-달’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두 ‘하나’다. 이러한 개념들, 연금술 작업을 모르는 인식들의 평가는 난센스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반영된 보편진리다. 궁금하면 좌우로 핥아 보면 될 일. 처음에는 많이 헛갈리겠다. 그래도 힘을 내라. 용맹정진하여 금을 완성하자. 연금술, 그 어원부터 불확실한, 그러나 그 위력은 너무나 명확한 학문 아래 영혼육을 연마하는 우리, 멋쟁이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타로, 카드일까?




타로, 과연 카드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 주님께 물어도 “아니라” 하실 걸? 그렇다면 알록달록 그림 가득한 저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간단하다. 타로, 타로라 발음하면 된다! 물론 지금도 카드공장서 수두룩 닥상으로 쏟아지겠다. 그러나 그것은 카드가 아니다. 분명하다. 타로는,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작고 두꺼운 종이나 플라스틱 따위가 아니다. 단순 안부나 축하나 연락 목적 같은 기타 소개장도 아니며, 그날의 내용을 정리한 표/다이어그램-카드도, 의료보험카드도, 공중전화카드도 아니다. 그래, 진짜 신경질 나는 대목, 게임도박/트럼프 카드도 아니란 말이다. 왜? 매일 아침 오광 뜨는 화투도 타로라고 하지!  


타로, 대체 무엇인가?


타로,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저 <경전>들의 ‘한 소리’, 그 위대한 선생들께서 기록하신 ‘법칙들’, 들어 본 적 있나? 쉽게 말해 타로는, 보편진리, 즉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꽉꽉 눌러 담은 그릇이라고! 갑자기 머릿속이 번뜩이는가? 믿고 따르라. 그 빛을 의지하라. 그게 ‘참-로고스’다. 그런데 내가 ‘타로=그릇’이라고 했다. 그릇은 ‘음(-) 여성형’이다. 음(-) 여성형은, 우리 세계를 가득 메운 그 힘의 ‘수동성’을 말한다.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고? 전통오컬트상징체계, 그 언어를 풀어본 것이다.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 흔히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하지 않는가. 주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그래서 인간을 ‘작은 이’, ‘소우주’라고 부른다. 신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4극자석 인간은, 작지만 강하다. 역사가 증명한다. 주께서 아담 코에 루아흐를, 그 생기를 꽉꽉 눌어 담았다. 저 타로=그릇처럼! 그 시절, 창조 과정 가운데 인간-존재는 음(-)이었다. 제 호흡을 하며 인생을 시작한 인간-존재는 양(+), 그러니까 이름과 형상을 입은 인간은 죽어가는 것이다. 진화는, 보편법칙에 따라 알아서, 재주껏 할 일이다! 


그러니까, 타로가 뭐냐고?


아까 말했잖아?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꽉꽉 눌러 담은 그릇이라고! 우리 혀로 담을 수 없는, 테트라그람마톤(JHWH)의 비의라고! 번뜩이지 않어? 보편진리 가운데 가장 ‘참된 것’을 기록한 ‘책’이라고! 그래, 책! ‘로고스-서판’이라고. 그게 타로라고! 그게 22권이든, 32권이든, 56권이든, 78권이든 말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타로는! 로고스-참지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재현한 호흡이라고! 이때 호흡은 쉬바의 것과 같겠지. 그러나 우리가 타로를 보는 ‘순간’, 읽는 ‘순간’ 그 타로 호흡은 양(+)이 된다. 또한 우리와 함께한 타로 호흡, 타로의 상징은, 저 인식 넘어 가장 불가해한 것으로, 우리의 뇌리에 콱 박히겠지. 그리고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 ‘읽지 못한 것’은, 우리 잠재의식 안에서 썩어갈 것이야. 곧 죽겠지. 해석받지 못한 상징-진동은 물질-시공간의 범주를 벗어나므로.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개인의 운명에서 집단 까르마의 비중은?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다를 보지 못했다.”
영화 <관상>에서 회한에 사무친 관상쟁이가 한 말입니다. 여기서 파도는 한 개인의 까르마요 운명이며, 바다는 시대정신이며 역사이며 집단 까르마입니다. 파도에 골몰하는 것은, 운명을 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지요. 이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까르마와 운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까르마는 원인과 결과라는 아주 단순한 우주보편법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나’ 라는 개인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마찬가지죠. 따라서 한 존재에게 적용되는 까르마는 존재의 여러 층위에 걸쳐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운명입니다.

C.G.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식-무의식의 2개 층 이외에도, 이 둘에 얽혀 있는, 주체의 여러 가지 측면을 논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본능, 충동, 욕망, 이성, 의지, 기억, 정신양, 그리고 원형 등등.
까발라 학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이 문제를 논했습니다. 까발라에서 탐구하는 주체의 열가지 측면은, ‘위대한 정신’과 수동적인 통찰(선천적 잠재력)과 능동적인 의지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원형’의 영역입니다. 원형은 누미노제, 즉 신의 영역입니다. 이미 원형의 영역으로부터 의지와 통찰이라는 양과 음의 영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림1> 의식의 측면들

우리의 까르마에는 겹겹의 베일이 존재합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주체 의식의 여러 측면들은 겹겹의 베일을 포함하는 깊이를 갖습니다. 복잡하지요? 결국, ‘나’ 라는 개별자는 이렇게 수평 수직으로 쪼개어 보면 몇 가지 에너지 덩어리들이 얽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몇 개의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점성학 천궁도에 표시되는 7행성입니다. 주체의 일곱 측면! 나머지 셋은 위대한 영, 세계혼, 전체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 덩어리들은 수직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드러나는 것과 잠겨있는 것, 즉 다시 양과 음의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중 가장 밑바닥은 원형과 맞닿아 있습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그 어떤 개별자의 경우를 막론하고, 선천적이며 집단적입니다. 집단의 경험이 기록된 창고 섹션인 셈입니다. 이 섹션들은 서로 얽혀 힘을 주고 받으며, 한 개별자의 여러 가지 본성과 충동을 결정합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상층부로 갈수록 개별적이고 후천적이며 표피적인 경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한 개체의 표면 상으로는 이 영역이 전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표면이야말로, 흙으로서 자기보존본능을 갖는, 영적 자아가 경험을 계속하게 만드는 윤회의 근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때문에 영적 자아 개체들은 윤회를 거듭해야만 합니까? 경험의 기록-흔적들은 끊임없이 축적되어만 가는데, 그 끝은 어디입니까? 왜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 회귀, 해탈을 삶의 목표로 삼을 만큼, 이 반복을 괴로워 하겠습니까?
하나, 즉 신으로부터 나뉘어진 개체는 확장-진화하는 신의 부분입니다. 우리 세계 전체는 확장-진화만 합니다. 부분은 퇴보와 진보, 확장과 수축을 거듭하지만, 전체는 확장만 합니다. 마치 파도와 바다 전체처럼 말입니다. 모든 개체, 즉 부분이 운동하며 확장-수축하며 진화-퇴보하며 경험한 흔적은, 전체가 확장-진화하는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요가 수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여지는 대상(현상세계)은 오로지 보는 자(신) 자신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목적을 위해 모든 개체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인 주인공이 그것을 보고 그로 인해 해탈에 이르고자” 스스로를 나누고 고정화하여 개체를 창조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 글의 목적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자 이제, 이른바 집단 까르마와 개별 까르마가 한 개체에게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명사 ‘새’는, 그 나름의 본성과 충동의 공통점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새가 실체입니까? 아닙니다. 개념입니다. 그러나 개념적 실체입니다. 까치와 까마귀, 독수리와 참새는 어떻습니까? 개념에서 실체로, 추상에서 구체로 조금 더 나아간 개념 집단입니다. 
추상적일수록, 개념적 집단일수록, 그것은 영적 자아와 가깝습니다. 선천적이며 집단적인, 한 개체의 본성과 충동을 좌우하는 전체입니다.
제 아무리 잘 난 새도, 새라는 개념적 실체 범주에 있다면, 날개와 이러저러한 본성과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는 집단의 축적된 경험이 한 마리의 새의 본성을 좌우합니다. 까치 까마귀 독수리 참새라는 개념적 집단에 이르면 본성과 습성은 더 구체화됩니다. 참새라도 조금 더 구체적인 종으로 나뉘어집니다. 환경에 적응하며 습득한 종의 습성은 유전됩니다. 모든 경험의 기록-흔적이 대를 거듭하며 그대로 적용되니까요. 주체의 층위 중에서 그 모든 경험-흔적을 기록하는 주체의 층취를 영적 자아, 멘탈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조금 더 복잡할 뿐,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화가 진행된 집단, 그 마지막 고리인 인간에게는 ‘의지’와 ‘심상화’ 라는 영역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내 운명의 표면은 그 모든 것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그 표면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품은 흙이며 윤회의 근거입니다. 나의 개별 까르마는, 내가 속한 개념적 실체로부터 구체적 개별자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 까르마를 표출하는 표면입니다.

그런데 집단과 개체는 별도의 실체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까지 간파했던, 바로 그 ‘전체와 부분’의 관계입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정언을 기억하시죠? 부분인 개별 까르마의 거대한 밑바닥엔 집단 까르마가 잠겨 있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편 추상적 실체인 한 집단의 집단 까르마는, 부분들 즉 속해 있는 개체의 경험을 통해 운동합니다. 경험들의 양이 쌓이면 양질전환을 통해 변성합니다. 즉 진화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진화 단계이며, 역사의 시대정신이고, 신의 측면입니다.

개별 까르마는 집단 까르마와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는 집단 까르마가 존재 방식에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 세계는 집단에서 개체로의 진화 일로에 있습니다만, 특히 인간이라는 개념적 집단에게서는 더욱 더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만, 그렇다고 거대한 집단 까르마보다 개별 까르마의 영향력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같은 시공간을 점한 동시대의 개체들은, 속해 있는 집단의 집단 까르마에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점을 볼 때 파도에 골몰하는 경우, 특히 표면의 정지된 형상에 집중하는 경우, 진짜 운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수직과 수평으로 짜여진 겹겹의 스펙트럼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화의 향방과 시대정신, 역사의 흐름은 물론이며, 개체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집단의 까르마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본성과 충동의 퀄리티, 즉 내용이 좌우되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동일한 천궁도를 가졌다 해도, 전쟁 상태의 시공간에 태어난 사람과 평화 상태에서 사는 사람의 퀄리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힐렉의 상태가 같다 해도 수명의 결정력은 집단 까르마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같은 상태의 천궁도라 해도, 일본인의 운명과 한국인의 운명은 색깔이 다릅니다. 충동의 색깔, 자극-반응의 메카니즘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추상적 실체,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특수’의 모순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성학은 단순한 공식으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닙니다.
겹겹의 베일을 가진 인간, 자연, 신, 세계의 본성과 운동 방식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학문입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LBRP: the Archangels

공기원소원리 대천사: 라파엘(RAPHAEL), 즉 신의 치유자
티페레트(Tiphareth): 태양(디오뉘소스의 비의)과 십자가 가운데 카두케우스(caduceus)

우리에게 태양은 진정으로 ‘생명을 주는자'(Giver of Life)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아버지 하느님이야말로 ‘태양 뒤의 태양'(Sun behind Sun)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사실 티페레트는 케테르의 직접적 반영물 아니던가. 생명이 이 땅에 오는 것은 태양의 중재를 통해서다. 우리는 ‘티페레트 의식’의 힘을 빌어 생명력의 근원에 닿을 수 있으며,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힘을 끌어올릴 수 있다. …(중략)티페레트는 소우주와 대우주를 매개한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곧 태양 영역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태양 뒤의 태양’은 현현을 위해 하나로 집중된다. …(중략) 이 영역에 해당되는 신의 이름은 엘로아 베다트(ELOAH VA DAATH)이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곧바로 ‘감취진 세피라’인 티페레트와 케테르 사이에 있는 다트를 연상하게 된다. …(중략) 따라서 ‘테트라그람마톤 엘로아 베다트’라는 문구를 ‘정신의 영역에 현현하는 신’이라 번역해도 될 것이다. …(중략) 티페레트의 대천사는 라파엘, 즉 ‘태양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영’이다. …(중략) 

<미스티컬 카발라> 289, 299, 301쪽 발췌

물원소원리 대천사: 가브리엘(GABRIEL), 즉 강한 남자, 신의 영웅
예소드(YOSOD): 달(셀레네, 루나, 헤카테, 이시스, 하토르)과 향수 가운데 성배(Saint Graal), 크리스탈 컵

예소드의 상징체계를 공부하다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상징 한 벌이 나타난다. 우선 한 가지 상징은 강함(strength)을 통해 확립된 우주의 기초’라는 개념이다. ‘강함’이라는 개념은 ‘아름답고 매우 강한 벌거벗은 남자’라는 마법적 이미지 안에서 다시 등장한다. 또한 샤다이라는 신의 이름(*SHADDAI EL CHAI), 즉 전능함과, 케루빔이라는 강한 천사들, ‘위대한 힘’이라는 비의적 이름을 가진 완드 9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상징은 달이다. 물원소의 대천사 가브리엘의 주재 하에 매우 유동적으로 조수 간만 상태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중략) 카발라 학자들의 가르침대로, 예소드는 다른 모든 세피라의 방출물을 담는 저장소라고 이해해야 한다. 또한 이 방출물을 말쿠트, 즉 물질계로 전달하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전달장치이기도 하다. 세페르 예찌라에 따르면, 이 방출물을 정화하고 검증하며 바로잡는 것이 바로 예소드의 기능이다. 따라서 조밀한 물질의 영역을 바로 잡기 위해 또는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곳 예소드에서 모든 설계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소드는 물질계에 효력을 미치기 위해 고안되는 모든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중략) 

<미스티컬 카발라> 364, 365쪽 발췌

불원소원리 대천사: 미하엘(MICHAEL), 즉 신과 같은 자
호드(Hod): 수성(헤르메스, 토트)과 이름 가운데 화염검(flaming sword)

* 이름, 즉 능력의 단어에 대해서는 <미스티컬 카발라> 301쪽(70, 71, 72), 359쪽(39)를 참조하라.

호드에 속한 신의 이름은 만군의 신 ‘엘로힘 쩨바오트(ELOHIM TZEVA’OTH)’다. 이 이름은 매우 재미있는 방식으로 자웅동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남성형 복수를 가진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카발라 학자들의 방식에 따르면 이중적 형태의 활동, 즉 유기체를 통해 기능하는 힘을 가르친다. …(중략) 쩨바오트는 군단 또는 군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에 의해 생기를 얻는 군단의 형상을 떠올리면서 호드 안에 현현하는 신성한 생명을 개념화할 수 있다. 강력한 대천사 미하엘은 호드에 배속된다. 우리는 다시 여기서 생각의 자양분을 얻는다. 그는 언제나 뱀의 머리를 짓밟은 채 검으로 뱀을 조각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균형의 상징인 저울을 들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것이 세페르 예찌라가 말하는 ‘근원자의 수단’과 동일한 개념이다. …(중략) 

– <미스티컬 카발라> 357쪽 발췌

흙원소원리 대천사: 오리엘/우리엘(AURIEL/URIEL), 즉 선한 청지기
세피로트(Sephiroth): 생명나무와 클리포트 가운데 원반(pentacle)

* 오리엘 소환 작업 中

움브라: 속히 내 부름에 응답하라! …(중략)

오리엘: 에덴의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딸들과 함께 세계의 균형을 고뇌하리. 어머니(Binah)께서 주신 권능으로 모든 이름과 형상 있는 것들의 종말을 예고하리라. …(중략)

움브라: 대체 누구냐?

오리엘: 나는 통합이며, 미쁘신 여왕의 번견이요. 4원소영역의 무덤이며, 세피로트(Sephiroth) 변방의 짐승이라. …(중략)

움브라: 그대 위계에 따른 업무는 무엇인가?

오리엘: 세계의 양(+)과 음(-)이 고이는 곳에서, ‘왕 되신 나의 주’의 섭리에 따라 산달폰(말쿠트, 어둠의 대천사)과 메타트론(케테르, 빛의 대천사)을 가르고, 이들의 팔다리를 제단에 바쳐 생명나무 밑거름 삼는 것이라. 원죄의 과실(過失)이 그러하니 세계의 과실(果實) 또한 그러하다. 법칙에 따라 카르마의 빚은 여기서 보상되며, 모든 에테르는 여기서 환원되리라. …(중략)

** 어린 입문자를 향한 오리엘의 경고
오리엘: 말쿠트(Malkhuth) 정의의 관문과 눈물의 관문, 그 문턱에 선 자들은 듣고 좌절하라. 32경로의 출입은 굽이치고 가파르다. 완벽 그 자체, 지고의 문턱을 열망하는가. 어떤 경로의 출입을 선호하는가. 그 경로가 무엇이든 험하기는 몇 갑절이라. 혹, 화살 경로를 찾는 형제여. 아서라! 중앙기둥을 타고 올라 심연을 거치기 전, 네 영혼이 상할 것임은 물론이요. 각 존재와 힘이 너를 영영 멸시할까 염려됨이라. …(중략)

<움브라 마법일지> 발췌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박영호(움브라) 선생님 글.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Quabalistic Cross



* Q.C.의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다.

1. 우리는 두뇌의식과 심상화와 의지력의 힘을 빌어 질료를 변성시킬 수 있다, ‘호흡’이 추가된 변성 작업은 더욱 효과적이다. 첫 호흡(RUACH) 안에는 창조, 유지, 파괴의 흐름이 내재한다. 4극자석은 ‘들숨’, ‘날숨’, ‘멈춤’의 비의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4극자석의 영향력 아래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법칙을 지배한 마법사에게 있다. 

2. 우주보편법칙에 따라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4극자석-인간존재는, ‘신의 형상’을 입을 수 있다. 형상의 에너지를 취해 테트라그람마톤(YHVH),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QC는 소우주가 소우주 안에서, 소우주가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신의 이데아와 진화의 국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우리는 차원 상승(Sephiroth)을 통해 절대 힘(우주적 신)을 그릇(자신) 안에 가득 채울 수 있다. 소우주 지배는 입문의 첫 단계다. 우리의 의식이 일상성을 박차며 쏜살같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 합일! 우리 존재 안에서 각 힘의 위치와 흐름과 순환의 이치를 깨닫는 것, 합일! 우리의 우식을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2000년 전의 태양을 삼키는 것, 합일! 지고의 법칙을 열망하고 이해하고 또 지배하는 것, 합일! 각 차원에 걸쳐 있는 자신의 3중체를 인식할 때, 우주의식의 첫 숨이 멈춤에 이를 때, 지고의 빛이 자기-전존재를 감싸게 될 것이다. 이 ‘빛’이야말로 아담카드몬(Adam Kadmon)의 오장육부요 피톨이다. 


3. 들숨과 날숨을 통해 멘탈-아스트랄 매트릭스의 긴장 상태(횡경막/에테르)를 유지하라. 긴장 상태의 우주-호흡은 에테르질료를 자극하며, 적합한 심상화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한다. 따라서 우주-4원소작용을 이해한 마법사는, 우주-에테르질료를 변성시켜 완전한 아담카드몬의 형상을 취할 수 있다. 


4. 아담카드몬으로서 첫 호흡을 시작한 마법사는, 손을 뻗어 ‘절대 힘’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카샤 혹은 아인 소프, 절대 음(-)이다. 그 상태로서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순수한 ‘없음’은 루아흐 엘로힘(RUACH ELOHIM), 우주-불원소원리(Shin: 300/Resht: 창조)다. 우리는 아타(ATAH)를 통해 세계의 첫 숨, 첫 의지를 아담카드몬 안에서 재현할 수 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바뀜은 아도나이 멜렉흐(ADONAI MELEKH), 우주-흙원소원리다. 말쿠트(MALKHUTH)를 통해 세계의 완성을 보라. “위에서와 같이 아래서도 그러하다.” 이제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 맞물린 하나의 세계다. 베게부라(V’G’BURAH)와 베게둘라(V’G’DULAH)를 통해 우주-남성원리(+)와 우주-여성원리(-)가 완성된다. 자연법칙과 운동이 마법사의 확장된 의식 아래 있다. 우리는 레올람, 아멘(L’OLAM, AMEN)을 통해 우주적 균형에 이를 수 있다. 서로 맞물린 세계에서, 영혼의 중심에서, 가장 적합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입문의 길을 따라 진보한 영은, 세계와 존재의 심도점(solar plexus)에서 신(힘)과 만날 것이다. 이것은 신의 이데아와 교통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중심(中心)이 중심 안에서, 중심을 통하지 않는, 그런 소환이나 기도는 없다. 아무튼, 결국 자신을 테트라그람마톤으로 채운 아담카드몬은 포화 상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균형’, ‘신과의 합일’인 것이다. 이제 마법사는 신의 권위를 입은 ‘완벽한 인간’이며, ‘전우주의 신’이며, ‘완벽 그 자체’다. 완성된 Q.C.는 완전함에 다다른 ‘최고 신성’을 표상한다. 모든 힘과 존재는 이 권위에 절대 복종할 것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박영호(움브라) 선생님 글.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오컬트 유추

M. 엘리아데는 저서 <신화 꿈 신비>에서 여러 문명권에 널리 퍼져 있는 ‘세상의 나무’ (생명나무)라는 상징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징이 갖는 힘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나무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인간의 의식에 엄습하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총체적으로 ‘알게’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은 “어떤 특별한 대상이 우주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 경험은 영적 행위로 변환되고 더 활성화 된다.” 오컬트 학문에서 상징이 갖는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목이다.

어떻게 <나무> 라는 사물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표상할 수 있는가? 이때 나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라는 사물은 제한된 의미-지시의 틀을 깨고 다시 태어난다. 4극자석인 인간의 정신, 즉 의식-잠재의식이라는 한 쌍의 대립자가 ‘본질>관념>형상’의 창조-진화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유추 작업에 돌입함으로써, 하나의 상징 이미지를 총체성 안에서 재탄생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오컬트 유추 과정 속에서 모든 상징이 궁극적 실재로 환원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형상-충동이라는 이원성이 통합을 통해 어떻게 부분을 전체로 환원시키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탐구의 주요 목표다.

(1)상응의 원리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컬트 유추법이란 인간 안에 발현된 진정한 자연(본성)을 모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4극자석과 상응합니다.”

이 짧은 언명 안에 오컬트 유추의 모든 원리가 담겨 있다. 인간 안에 발현된 신의 본성(진정한 자연), 그리고 그것이 갖는 4극자석으로서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유추 능력을 납득할 수 없다. 따라서 우선 인간의 유추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4극자석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살펴 보겠다.


<헤르메티카>에는 (원형적)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다음, 신의 양극 분할과 그 형태화 양식 즉 7행성의 본질을 나눠 받고 창조자의 반열에 올라선 다음, 하위 자연과 결합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헤르메티카>는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실락, 즉 하위 자연과의 결합을 통해 4극자석이라는 ‘신의 형상’을 완성해 구현해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뉨과 통합을 반복하며 순환의 고리를 확장해 가는 창조 행위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음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 인간 즉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창조자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실락한 인간, 즉 말쿠트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 안에 하나의 ‘기억’으로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 안에 발현된 본성은, 세계를 창조했던 모든 기억, 펼쳐짐의 모든 과정을 응축해 가지고 있으며, 창조-진화의 모든 기억이 영-혼-육의 다양한 시스템 안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각 차원에서 그에 걸맞은 창조 행위를 반복-재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선험적 기억과 창조 행위의 모방을 통해 인간은 ‘기호 작업’을 한다. 언어 체계와 표현-해석-소통 능력은, 그것이 말이든 문자든 기호든 상징 언어든 막론하고 모두, 세계의 창조-진화 패턴을 모방하는 물화(物化) 작업이다. 또한 기호 또는 상징 이미지에 집중해 추상적 실재 즉 본질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은, 창조-진화 패턴의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탈물화(脫物化) 작업이다. 이 두 가지 패턴은 모두 두 번째 로고스에 해당한다. 두 번째 로고스는 신의 말씀(첫 번째 로고스)을 모방하여 재현하는 언어-문자-기호 체계를 말한다. <쎄페르 예찌라>는 바로 이것의 원리를 파헤치는 문헌이며, 카발라는 이 창조 행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진동의 학문이다. 물론, 상징 언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따라서 카발라는 우리가 오컬트 유추법의 구조와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상응법칙은 위의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카발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창조의 국면들을 살펴 보자. 아찔루트계(원형계 : 모든 모티프가 형성되는 국면), 브리야계(창조계 : 양극 분화를 통해 형상의 단초가 기획되는 국면), 예찌라계(형성계 : 충동과 제한의 작용을 통해 다양한 형상이 물화의 틀을 구성하는 국면), 앗시야계(작용계 : 예찌라계에서 만들어진 제한-형상의 틀이 다양하게 결합하여 시공간의 사건으로 구성되는 국면)는 모두 앞선 세계-국면의 모든 과정을 자신 안에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실락을 통해 완성한 4계의 마지막 존재 국면에는 앞선 모든 국면이 반영된 형태로 재현된다. 물론, 인간 자신은 그 모든 것의 집약물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짜로 마음을 먹으면, 이 모든 국면을 왕래하며 각 국면의 패턴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딱딱한 물질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인간의 다른 차원 즉 혼과 영은 각각이 속해 있는 세계 즉 아스트랄계(앗시야의 예찌라)와 멘탈계(앗시야의 브리야)의 자유로움에 놓여 있다. 이들 혼과 영의 활동은 육체가 물질계의 사건과 맞물려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순간에 시공간의 제한 속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각인된 ‘기억’은 시공간의 제한 속에 드러나는 국면을 잡아채어 그 연결선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상응법칙의 연결선이며, 우리는 각 차원의 상응성을 찾아내는 유추 작업을 통해 그 ‘기억’을 가동시킬 수 있다. 

결국, 오컬트 유추는, 상응법칙에 토대하여 인간의 영-혼-육이 벌이는 또 다른 창조 행위다. 우리는 이 창조 행위의 섬광 같은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재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의 일상 의식은 이 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대부분 무시한다. 유물론적인 현대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의도적인 유추 작업, 즉 모든 국면의 상응관계를 탐구하여 본질에 다가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각 국면의 상응성을 찾아냄으로써 전우주의 총체성에 다가설 수 있다. 우주에 가득한 신의 이름, 그 울림의 멜로디가 상응관계에 따라 수축의 경로를 흐르다가 ‘하나’로 환원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상징과 상응

그렇다면 상응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어떻게 어떤 형태로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층위도 다르고 밀도도 다른, 이것들과 저것들을 연결해 총체성을 획득할 것인가? 다이온 포춘은 <미스티컬 카발라>에서 상징 이미지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카발리스트들은 조금 다른 과정을 택한다. 그들은 정신에 형이상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추상적 실재의 정제된 공기 속으로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다. 대신 눈에 보이는 실재적인 기호에 집중하여 이 상징을 통해 추상적 실재를 표현한다.” (39쪽 06번)

이처럼 우리가 먼저 상징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상징은 자연의 언어입니다. 다양한 영상, 숫자, 색깔, 기호, 소리 등이 상징으로 이용됩니다. … 자연은 바로 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잠든 동안 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이지요. 카발라 생명나무는 탁월한 상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8쪽)

여기서 자연의 언어란 별빛,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시적 표현이 아니다. 매우 개념적인 카발라 용어로서, 1로부터 방출된 에너지의 진동이 형상화되어 영상(이미지), 색깔, 기호, 소리 등 제한된 스펙트럼으로 구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에너지의 진동이 우리의 일상적 인지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된 상태라는 말이다. 예찌라계 이후의 세계 즉 하위 자연의 세계에서 진동은 이처럼 일정한 형태를 띠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지구영역인 앗시야계에서 모든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발현된 우주의 각 국면들, 즉 각 계를 넘나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높은 진동, 분산되지 않은 고밀도 빛은, 우리의 일반적 상태에서 단계를 건너뛴 채 곧바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이온 포춘이 지적한 대로 “훈련받지 않은 지성(사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다.

따라서 순수 관념과 만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태를 띤 구체적 실재들이 연결되어 단계별 통일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학, 기호학, 심리학, 신화학 등의 오랜 연구 결과 안에 이 과정에 대한 실마리들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물론 헤르메스학과 카발라의 심오한 상징언어는 한꺼번에 그 구조 속으로 들여보내 준다. 각 국면 및 계의 단층에 뻗어 있는 형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첫’으로 환원시키는 충동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단계별로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인문학적 탐구와 오컬트 학문, 이 두 분야는 각각 오컬트 유추 과정의 구조를 구석구석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하게도, 이들 각 학문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며 따라서 시선이 꽂히는 면이 다르다.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우주의 다른 측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훑어가며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 하위 자연의 언어인 상징을 통해 어떻게 본질(추상적 실재, 관념)로 이동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열쇠다. 우리는 상징의 가치, 상징의 구조, 상징의 해석 및 의미화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지점들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상응성에 토대를 둔 상징이 발휘하는 역동적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징언어와 추상화-의미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체들을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호로서의 상징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로 하자.

(3) 기호의 구조와 상징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과 언어학의 성과들을 통합 정리하여 ‘기호현상’을 ‘기호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는데, 그의 ‘구조’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구조’에 비해 인간 정신의 운동성을 훨씬 잘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기표-기의>의 결합체로 파악한 언어학자들에게 언어는, 규약에 의해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제한된 기호였다. 이에 비해 상징 기호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의성(多意性)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코는 기호란 종류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쨌든 기호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에코는 그의 책 <기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미 과정의 한 요소로서 기호를 분류할 때 기호는 어쨌든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은 기호를 <다른 것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퍼스는 … <어떤 관계나 명목하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관계>는 기호가 그 대상의 전체를 가리키기보다는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저런 관점이나 특정한 실천적 사용의 관점에서 그것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46쪽)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를 위해”란 소통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전제된다. 그러나 범위를 더 넓힐 수도 있다.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한다는 것은, 힘 자체의 운동에 기인한다. 어떤 에너지가 운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후의 단계는 전 단계를 반영한다. 그렇지 않은 운동은 불가능하다. 이때, 전 단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는 한 지점에서 그 앞의 운동을 가리킬 때 “그것을 대신”하여 기호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을 대신하는 재현 방식은 ‘모방’이다. 그런데 대상 전체를 가리킬 수는 없다. 반영하는 지점에서 볼 때 반영의 모체는 전체이며 반영물은 결과이자 부분이므로,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에코가 이러한 개념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기호에 추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는 기호와 정신의 역동적 구조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에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인용한다. “기호는 결과의 명백한 전항(前項)이다. 아니면 이와 반대로, 유사한 결과들이 확인되는 경우, 기호는 전항의 결과이다. 결과가 확인될수록 기호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때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 의미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맥락’의 공유가 필요하다. 에코는 이것이 사회적 규약으로서의 코드 공유에 한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불문하고 코드가 공유되는 맥락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다. 원인-결과의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래밍된 창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것이 단순한 자극-반응이라면 ‘연상’의 형태로, 복잡한 지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추론’ 즉 유추의 형태로 ‘기억’을 끄집어내 창조-모방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기호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때 상징은 모두 기호라 부를 수 있다. 다시 에코의 인용을 재인용해 본다. “볼프(Wolff)는 기호를 <다른 것의 과거 또는 미래의 존재를 추론하게 하는 무엇>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스토아학파를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학자들은 기호를 <정당한 연결로 구성되어 결과를 밝혀낼 수 있는 명제>로 정의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수학에 반대하여>)” 또한 아바냐노Abbagnano의 <철학사전>을 인용하면서, “기호는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은 기호의 가능성은 기호의 구조에 기인한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기호 규정을 정리하기 위해, 기호의 구조에 대한 견해들을 크게 두 가지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해 보겠다. 그림1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처럼 하나의 기호(언어)가 이원적 항 즉 시니피앙(Sinifiant)-시니피에(Sinifié)로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소쉬르처럼 언어가 이 두 항의 결합체라고 파악할 수도 있다. 이 두 항은 형식–내용으로 이해된다. 그림2는 기호의 다의적 지시 구조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이다.

<그림1> / <그림2>


에코가 시니피앙(Sinifiant)과 시니피에(Sinifié)라는 기호 구조를 역동적으로 만든 핵심은, 기표=형식 / 기의=내용 이라는 <지시의 일방성> 도식을 벗어버린 데 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각각의 형태-실체를 갖는다. 이 두 항이 각각 자기 운동을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실재로 바뀐 것이다.

원래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기호는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표현)의 결합체다. 예컨대. <1>이라는 숫자는 시니피앙으로서 수 ‘하나’라는 시니피에를 지시하는 가장 단순한 기호다. 인간은 고도의 추상성, 즉 헤아림이라는 관념을 응축시켜 형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모방 과정을 거쳐 표현(형상)과 의미(힘)의 통합체인 실재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곧 두 번째 로고스로서, <말씀>의 모방-재현 작업의 의미다. 그런데 그림2의 구조에서는, 이때 일단 만들어진 기호의 이원적 항, 즉 기표-형상과 기의-힘은 각각 나름의 실체와 형태를 가진 독립된 실재가 된다. 그리하여 에코의 입장을 채택하는 경우, 기표는 나름의 다의적 변주를, 기의도 나름의 변주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다른 차원에서 지시하는 중첩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프란츠 바르돈이 지적한 것처럼, 영상 숫자 빛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다양하게 중첩되어 확장된다. 이것이 곧 세 번째 로고스이자 형상화를 거친 자연의 언어다.


(4) 다의성으로서의 상징

이처럼 기호는, 수학에서 사용하는 지시 부호(수학 부호)나 규약(합의)으로 제한되는 언어기호까지도 일의적이 아니라 다의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폐쇄된 하나의 틀(말하자면 수학이나 언어 사전) 안에서라면. 각 기호는 일의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난 다른 맥락에서 모든 기호는 다의적이다. 엄격하게 일의적인 수학 기호조차 그러하다. 오컬티스트들은 물론이고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하나의 수 체계에서 비롯된 하나의 <수-기호>가 얼마나 다양하게 형식과 의미를 확장해나가는지 알고 있다.

이처럼 기호가 의미를 확장해 다의적이 되도록 하는 메카니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우선 기호 즉 지시물이 지시하는 대상의 특성에 기인한다. 즉, 기호는 전항(前項) 즉 전 단계의 특정 측면을 가리키는 창조-모방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기호 표현과 기호 의미가 각각 형태와 실체를 가지고 전방위적으로 전항의 힘을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번째 로고스다. 또한 이 기호는 연상 또는 추론을 일으켜 창조-모방의 역방향으로 전항의 전체를 재구성하는 작업 도구로 쓰인다.

예를 들어, 물질 행성인 ‘금성’을 가리키는 <금성>이라는 단어는 물질 우주의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다. 천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라면, <금성>이라는 기호는 단 하나의 사물만 지칭하는 일의적 지시물이다. 그러나 맥락이 열리는 순간 <금성>이라는 기호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얹혀지기 일쑤다. 고대로부터 <금성>이라는 기호는, 그 찬란한 빛과 새벽과 저녁을 오가는 특이성 등 때문에 찬란한 사랑, 에로틱 등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점성학이나 연금술 등 오컬트 학문의 맥락에 편입되면, <금성>은 상위 계의 특정한 힘을 표상하는 상징물로 재탄생하여 전항, 즉 상위 계의 그 힘을 반영-모방하는 지시물이 된다. 물질 금성이 가진 속성이 전항의 그 힘(원인)과 부분적으로 상응하는(결과)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천문학 이전에 점성학에서 이 상응성을 고려해 창조-모방한 기호이므로, 그 유추 과정의 원천은 점성학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상응성이란 물론 소리나 모양의 모방을 포함하겠지만, 규범론적 언어학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형상의 모방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창조-모방의 초점은 원인적 차원의 힘이 운동을 통해 어떻게 나뉘고 결합하는지에 모아져 있다.)

그 이후 <금성>이라는 기호는 기의와 기표 차원에서 각각 독립적인 다의성을 확보했으며, 매우 단순한 도상적 기호에서부터 시적 상징, 종교적 상징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기의와 기표는 서로 중첩되며 상위 차원의 힘, 즉 전체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호는 부분이므로 전항의 그 힘 전체를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상화 과정을 거쳐 그 힘 전체를 유추할 수 있게 하며, 상응 목록이 쌓일수록 지시하는 ‘전체’의 ‘부분’도 확장될 터이다.

이와 같이 기호의 구조가 확장되는 경우, 모든 기호는 상징의 다른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아바탸노의 <철학사전>이 규정한 것처럼, “모든 사물과 사건”이 전항의 어떤 측면을 가리키는 지시물로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중세 스콜라 학파의 상징주의처럼 “우주는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은 사물이라는 기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을 매개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그래서 성서의 모든 사건과 기호를 “철저하게 일의적으로 읽어야 한다(토마스 아퀴나스)”고 결론 내린다면, 또는 범기호학의 주장처럼 “스스로를 의미하는 전체로서의 우주, 즉 만물 단위의 의미만이 지배한다(파졸리니)”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될 것이다.

(5) 정신의 구조와 상징

그러나 두 번째 로고스 즉 창조-모방 작업을 통해 기호-상징의 지위를 얻은 기호라 해도, 그것이 세 번째 로고스로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자연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해도, 어떤 맥락에 얹혀져 해석되지 않으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네 번째 로고스, 즉 해석 작업을 통해 유추하는 인간 정신이 여기 결부됨으로써 진정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츠 바르돈은 앞서 1장에서 인용한 구절을 통해 “오컬트 유추가 4극 자석과 상응”한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이렇게 엄청난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어떻게 인간은 기호를 만들 수 있으며, 기호를 해석할 수 있는가? 기호 특히 언어체계는 우리의 정신구조와 동일한가? 이 우주가 신의 말씀이자 언어의 표상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상징인가? 그렇다면 단일한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하는가? 그 해석은 우주에 가장 안정적인 하나의 합법칙성만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로크와 흄과 버클리를 거치면서 결국, “지각적 시니피에의 개념을 기호 현상의 결과로서 정의”할 수 있는가? (움베르트 에코, <기호> 222쪽)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헬레니즘 이후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식론과 언어학, 기호학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논쟁이 이루어진 문제다. 우리가 여기서 그 역사적 진행과정을 세세히 들여다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곳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학문적 탐구 여부와 상관 없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원시인에서 고대인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로서 인간 정신을 추상적 관념의 영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물론 아무런 추상화 작업 없이, 뜬금없이, 본질로 훌쩍 안내한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다.)

프로이트 이후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가 횡단되었고, 위에서 제기된 문제는 인식론이나 언어학 또는 기호학의 범주 밖에서 수많은 임상 실험을 거쳐 다른 차원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의 정신 즉 멘탈체가 의식-잠재의식의 양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둘의 상호작용에 대해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대 헤르메스학과 카발라 전통에서 명료하게 전개하고 있는 모티프(양극에 걸친 정신 작용)가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의 전통과 함께 심리학의 연구 결과로부터, 앞에서 제기된 기호 해석, 즉 역방향의 창조-모방 작업, 추상적 실재로의 의미화 작업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G.융은 <원형과 무의식> 31~32쪽에서 ‘2차적 주체’라는 명칭으로 당시만 해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던 잠재의식의 실체를 논증하고 있다. 이 논증은 잠재의식(무의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약 의식 내용이 에너지 손실에 따라 의식의 문턱 아래로 들어가서 무의식이 되고, 반대로 에너지 증가에 따라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가능하다면,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의식성이 되도록 해주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무의식적 과정은 문턱을 넘어서지 않아서 자아가 인지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융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무의식이란 의식의 억압에 의해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억압을 해소함으로써 해당 무의식이 에너지를 얻어 의식성을 획득하도록 하는 과정을 치료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융은, 우리의 정신은 원래 이차적 주체를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이는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융의 같은 책 다음 내용을 참고하자.

“그러나 무의식적 과정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고 문턱 아래의 이차적 주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즉, 가설에서는 의식성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양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 주체가 왜 문턱을 넘어서서 원래의 자아의식에 편입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다. … 이차적 주체의 존재는 억압 덕분이 아니며,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의 결과를 표현한다. …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의식화되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차적 주체도 자아의식에 영향을 주는데 다만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상징들’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그 표현이 썩 적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의식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우선 징후적symptomatisch(징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에 근거를 두는지 알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는 부호학적semiotisch(기호)이다.” (문장 중 징후, 기호 부분을 제외한 볼드체 부분은 인용자의 표기임. 이 표시는 번역어를 인용자의 의도에 따라 수정하기 위한 것으로, 징후적은 징후로, 부호학적은 기호로 수정함)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자아의식’과 ‘잠재된 이차적 의식’을 가르는 ‘문턱’ 개념이다. 융은 문턱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스펙트럼, 즉 도수 위에 특정 양태의 정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때 문턱은 각 정신양Psychoide의 경계다. 광도, 즉 스펙트럼 위에 있는 다중적 정신. 이것이 융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출발점이다. 헤르메스학이나 카발라를 공부하는 이에게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우리의 의식 위에 그리고 아래에 다중적인 양태의 정신들이 펼쳐져 있으며 이것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개념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물론 실제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융은 이 전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제시한다.

우선 융은 정신의 해리 현상이 별도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 관계’로서 자아 안에 통합되는 개념임을 강조한다.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자 동시에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면에서는 의식적이며 다른 면에서는 무의식적이다. 모든 모순이 그러하듯이, 위와 같은 사실도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여기에 있고 무의식은 저기에 있다는 식으로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히려 정신은 의식적-무의식적 전체성을 표현한다.” (<원형과 무의식> 63쪽)

경계를 가진 다른 양태이지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 둘은 하나의 다른 양태(모순적인)일 뿐 별개의 자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현상을 ‘자아의 양극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프란츠 바르돈이 명쾌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멘탈적 양극성은 능동적 즉 양(+)인 의식과 수동적 즉 음(-)인 잠재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전기적 흐름과 자기적 흐름이 멘탈 영역의 양극을 대표합니다.”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64쪽)


“생각하는 행위는 질이며 또한 양이기도 합니다.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능동적 영역인 일반적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수동적 영역으로 잠재의식 부분입니다. 의식과 잠재의식은 둘 다 생각하기의 질적 개념에 포함되며, 힘껏 노력하면 그 양이 증가하게 됩니다.” (같은 책 28쪽)


“자아의식은 멘탈계에서 영이 갖는 근본 속성으로, 우주 흙원소가 지닌 양태입니다. … 대뇌의 영역인 의식은 멘탈계와 멘탈체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5쪽)


“잠재의식은 우리의 모든 부정적 속성을 보여주는 거울로, 아스트랄체 안의 간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6쪽)

바르돈에 따르면, 우리 영, 즉 멘탈체의 외연을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가 ‘생각하기’의 주체인 의식이며, 이 의식의 반영인 다른 한쪽이 곧 잠재의식이다. 의식은 멘탈계(관념의 세계)에, 잠재의식은 아스트랄계(이미지-형상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양과 음이라는 한 쌍의 실재가 우리 자신이며, 능동적 또는 수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속성의 스펙트럼 위에 포진되어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결국 의식-잠재의식의 한 쌍은 우리의 영-혼-육을 오가며 자신을 드러내는 ‘자아의 양극성’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문턱’이 있다. ‘베일’이라고도 부르는 경계로서, 한 쌍이지만 다른 속성의 운동성을 갖는 각 에너지가 각자 나름의 운동을 할 수 있게 틀을 짓는 ‘매트릭스’다. 사실 흙 원소로서의 자아의식은, 이 매트릭스 자체이기도 하다. 이 매트릭스는 양의 흐름과 음의 흐름을 포괄하는, 말하자면 의식의 모순으로서 잠재의식까지 함께 포괄하는, 모든 운동의 총합이다. 동시에 양과 음의 운동하려는 충동에 따라 매개하고 전달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스펙트럼인가에서 감각을 통해 수용된 정보는 의식-잠재의식에 의해 포착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각각 독립적으로 자신의 운동 영역에서 포착하는 정보들(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을 수용한다. 물론 육체의 의식이 자리잡은 육체 대뇌에서는 시공간으로 제약된 정보를 수용한다. 그러나 아스트랄체 대뇌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정보를 수용한다. 멘탈체는 시공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정보를 수용한다. 잠재의식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이 수용되어 있으며, 이를 가리켜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앞서 상징이라는 기호가 ‘기표-기의’라는 이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은 실체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또한 이들이 서로 중첩되며 다의적으로 확장되는 모습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양극성으로서의 자아의식이 각자의 운동영역에서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며 처리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상징의 해석이라는, 진정한 네 번째 로고스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6) 해석과 환원
 
5장에서 융이 제시한 두 번째 주의해야 할 사항을 살펴 보자. 자아의식의 양극성, 즉 의식과 잠재의식의 상호교류에 대한 문제다. 우리 의식에 포착되는 잠재의식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근거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징조”의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상징 기호”다. 자아의식에 자신의 내용을 드러내는 잠재의식의 형태는 이 둘 중 하나다. 움베르트 에코가 지적했듯이, 징조는 단순한 자극일 뿐으로, 일정한 “연상”작용을 가능하게 할 뿐 해석 과정을 포함하지 않는다. 징조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채 “주관적으로 인식된” 내용이다. 완전한 의식화 과정은 의미와 근거를 알거나 안다고 추정되는 한에서 ‘상징’이라는 기호를 “유추”하는 작업을 통해 일어난다. 꿈에 드러난 잠재의식의 내용은 징조일 뿐, 해석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유추하고, 완전한 의식의 영역에 그 내용을 포괄할 때 기호-상징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은, 의식-잠재의식 즉 양극성(모순)의 통합원리에 걸쳐 있는 자아의식의 작업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예찌라계라는 형상의 세계에 얹혀 있는 의식의 작업 영역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상징은 자연의 언어, 즉 형상의 세계에 속한 힘의 형태다. 따라서 이미지라고 일괄해 표현하는데, 이때의 이미지란 이마고imago, 즉 모방-재현된 형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르돈이 지적했듯이, 영상, 리듬, 숫자,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모두 이마고로서의 상징이다. 힘의 진동이 형상을 입고 드러난 형태들인 것이다. 이 또한 이원항의 결합체로서 기표(실체와 형태)-기의(형태와 실체)의 양극성이 결합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때의 양극성은 관념의 세계나 가장 근원적인 첫 힘의 양극성과는 다른 존재 양식으로 드러난다. 형상의 세계인 예찌라계에 드러난 힘은 자웅동체(암수한몸)가 아니라 양성구유(어지자지)인 것이다. 세계의 ‘첫’인 단일자, 즉 신은 자웅동체로서, 모든 양(남성성, 충동으로서의 힘)과 모든 음(여성성, 충동을 제한하여 형상화하는 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힘이 분화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형상을 입게 될 때, 여기 반영-재현되는 힘은 분화되었던 자신의 극성을 그대로 가진 채 포괄된다. 양성구유가 그것이다. 예찌라계의 양성구유적인 존재양식은 네짜흐와 호드, 그리고 예소드로 표현된다. 다이온 포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네짜흐와 호드)은 하위 차원의 힘과 형상을 대표한다. 네짜흐는 자신들이 낳은 본능과 감정을 나타내며, 호드는 구체화된 정신을 나타낸다. 대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둘은 힘이 형상으로 구체화되는 두 가지 단계를 나타낸다. 네짜흐에서 힘은 아직 비교적 자유로운 운동을 유지하고 있다. 극도로 유동적인 상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 정도로만 묶여 있다. 그러나 호드에서 힘은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일정하고 영구적인 형상을 띠게 된다.  … 네짜흐에서 모든 정신은 집단정신으로서만 존재하지만 호드에서는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 시작된다.” (미스티컬 카발라> 324쪽)

“예소드는 정신과 물질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고유한 실체의 영역이다.” (같은 책 364쪽, 368쪽)

네짜흐와 호드에서 우리의 정신, 의식-잠재의식, 특히 예찌라계와 동일 스펙트럼을 지닌 아스트랄체(혼)이 자연의 힘에 작용한다. 여기서 이미지를 만드는 인간 정신은 “아스트랄 빛이 형상을 띠고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감각할 수 있는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속적 형상으로서 개념화 작업이 나타난다. 예소드의 존재 양식이라는 스펙트럼에 위치한 우리의 혼은 이 이미지를 실체 경험 사물과 연결한다.”


사실 힘-충동인 네짜흐의 존재양식과 형상-틀인 호드의 존재양식은 서로 겹쳐져 극성의 넘나들이가 빈번한 상태로 존재한다. 다이온 포춘은 특히 실천적 측면에서 힘은 호드에서 네짜흐로, 네짜흐에서 호드로 흘러들어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소드는 물질과 정신의 넘나들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존재 양식이다. 바로 여기, 기호-상징의 확장과 해석, 유추 작업의 가능성이 있다. 예찌라계, 그리고 예소드의 매개에 의해 앗시야계에 걸쳐, 기호 자체의 양극성과 우리 정신의 양극성이 상호작용하는 작업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3장의 그림2를 통해 기호가 다중적 확장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살펴 보았다. 자연의 언어인 상징은, 네짜흐 호드 예소드 라는 하위 자연의 존재양식 중 어느 특정한 스펙트럼에 놓여 있다. 그것이 기표의 형태다. 예컨대 숫자는 호드의 스펙트럼에, 리듬은 네짜흐의 스펙트럼에, 사물은 예소드의 스펙트럼에 얹혀 있다. 상응법칙에 따라 이 기호를 만든 누군가는, 이 기호가 가리키는 추상적 실재, 즉 관념의 세계에 배속된 본질과 기호의 동질성을 발견한다. 이 작업은 그의 잠재의식이 기의의 실체와 교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기의의 형태(파동)를 인지하고 기표의 실체와 연결하는 작업은 기호 생산자의 의식화 과정이다. 그의 의식은 기표와 기의를 연결함으로써 양성구유인 특정 기호-상징을 생산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세 번째 로고스 작업인데, 기호 생산자의 임의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로고스라는 규칙에 따른다. 이것이 수체계, 언어체계, 상징체계 등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이 체계는 원형의 세계, 모든것의 모티프가 만들어진 아찔루트계의 분화-통합 모델을 모방한 것이다.

우리의 유추 작업은, 이 과정을 거꾸로 모방 재현한다. 다이온 포춘은 이 과정을 “상징에 정신을 집중하면, 바로 그 힘과 접촉하게 된다”고 묘사한다. “바닷물이 통로를 따라 호수로 쏟아져 들어오”듯, 우리 의식과 우주의 잠재의식 사이에, 그리고 우주의 의식과 우리의 잠재의식 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융의 ‘원형적 무의식’은 이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단순 모방에 그친다면, 이를 네 번쨰 로고스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의식-잠재의식의 작용에 따라 기의의 확장은 물론이고 기표의 확장이 이어진다. 우리 안에 프로그래밍된 창조자의 힘이 파생을 거듭하며 창조를 재현하는 셈이다. 잠재의식은 수용된 정보를 바탕으로 기의-기표의 확장을 이어나가며, 의식은 이 둘을 개념화하며 연결시킨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 로고스는 기표-기의의 통합 작업을 통해 ‘관념화’ 과정에 들어선다. 이것이곧 ‘완전한 해석’이며 본질과 만나는 과정이다. 우리 의식-잠재의식, 즉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정신은 예찌라계에 얹혀 있는 작업과정을 거쳐 그것이 표상하는 본질-개념을 도출한다. 또 다른 차원의 의식화 과정인 셈이다. 형상화된 잠재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 말이다.

문제는 잠재의식이 포착해서 축적하는 내용들을 어떻게 의식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훈련을 통해 잠재의식을 통제함으로써 잠재의식의 내용들을 관념의 창고에 배속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인 유추 작업을 통해 그 통로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조언한다.

훈련은 지난하지만, 일단 상응성을 파악하는 유추 작업의 파일이 쌓이면, 그리고 “하나를 통해 근원으로 환원시켜 같은 속성끼리 분류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섬광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상징으로 본질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오컬트 유추법의 핵심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점성학의 목적과 연구방법

★ 점성학(Astrology)이란 무엇인가?

우선, 점성학이 학문인지 술법인지 (따라서 점성학인지 점성술인지) 논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어에 수반되는 ‘의미화’를 위해서는 그 목적과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용어가 윤곽을 드러낼 것이므로.

본격적으로 점성학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점성학이라는 분야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칼럼을 통해 문제제기를, 아티클을 통해 다양한 근거와 분석, 논리적 추론 등을 거칠 생각입니다.

그런데 “증거를 대봐” 라는 말 속엔 근대적 학문 연구법, 그러니까 실증적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검증’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점성학을 비롯한 비의적 학문을 연구할 때 이런 방법으로는 곧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점성학뿐 아니라 카발라나 헤르메스학 등 비의적 학문을 연구하는 데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문제지요. 인류 문명의 기저에 살아 숨쉬는 이러한 비의들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남아 있는 퍼즐 조각, 그러니까 무덤에서 파헤친 유물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다양한 논문을 써냈습니다. 하지만 빈 구멍을 메우기엔 역부족이었지요. ‘물질적 증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후대의 ‘위작’이라거나 어딘가 비어 있는 ‘불완전한 학문’이라거나 덜 떨어진 ‘원시인의 가상한 노력’이라는 식의 결론이 불가피해졌으니 말입니다.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수많은 유럽 학자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의 사막과 폐허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순수한 동기를 지닌 학자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기도 했지만,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하는 것 같은 탐욕에 눈먼 도굴꾼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어찌 됐든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근대의 안경을 끼고 옛 선조들을 깔보던 대중들에게 우리 선조들이 생각보다 그리 원시적이지만은 않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근대적 자만’이 뭔가 이상하다는 의구심도 스멀스멀 피어 올랐습니다. 고대의 지혜에 탐닉하여 미스터리로 발전시킨 마니아 층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웹이라는 공유의 바다에 떠다니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는 이러한 연구작업의 결과와 호응 방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놓고 고민한 결과, 우리는 점성학 연구방법으로 두 가지를 병행할 생각입니다. 첫째는 인문학자들이 일궈놓은 유물과 분석 작업의 성과들을 참조하며 재분석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이집트, 초기 헬레니즘의 점성학-천문학 관련 유물이나 텍스트를 재분석하는 작업입니다. 동시에, 더 본질적인 작업은, 이들 고대 문명의 점성학-천문학의 성과물(관측이나 예언 텍스트 또는 그림들) 배후에서 실제 철학적 토대로서 이들을 아우르는 핵심 관념을 척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힘의 본질과 실재화를 다루는 ‘비의 체계’를 중심에 놓고 거기서 뻗어 나온 점성학이라는 가지를 살펴 보는 것이지요. 물론 근대 이후 점성학자들도 표면적으로는 이 작업을 해왔습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가 점성학을 가능하게 하는 명제라고 표명해왔으니까요. 그러나 이때 사용하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이 정언은, 물질 우주(위)의 행성과 별이 인간의 삶(아래)과 조응 또는 결정한다는, 극히 제한적인 유물론적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여기서 관측과 통계가 점성학의 실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겠지요. 근대적 관념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점성학이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전혀 유물론적이지 않은 미신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맹목적인 ‘결과’에 집중합니다. 물론 적중률은 “맞으면 좋고 틀리면 어쩔 수 없는” 입니다. 미신으로 대하는 것이 상식적인 사람들의 추세니까요. 점술을 업으로 삼는 점성가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상황이지만, 점성학을 위대한 학문의 한 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쾌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추세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성학의 가치를 올바로 알고자 하는 탐구자에게는, 또한 비의 체계의 한 분야로 점성학을 바라보는 오컬티스트라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관념입니다. 헤르메스학연구소의 점성학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 이제 다시, 점성학이란 무엇인가?

헤르메스학의 관점에서 또는 카발라의 신성방출 관점에서, 세계(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전우주)의 진화 방향은 ‘분화’이며 이것은 ’복합화’를 수반합니다. 진화의 마지막 국면인 인간과 그 거주지(이 둘은 질료가 같습니다.)에는, 가장 세분화된 진화의 코드가 앞선 진화의 모든 국면을 반영해 아우르며 존재합니다. 분화의 과정 중 모든 것을 반영하는 일단락-통합 국면인 셈이지요. 이처럼 개체화 본능은 우주 진화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한편 반대 방향으로 합일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신(최초의 원인)과의 합일 욕구는 이를 드러냅니다. 모든 비의체계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영적 진보의 방향입니다. 

‘신성’으로 일컬어지는 힘의 ‘분화 – 합일’의 양 측면을 다루는 학문이 있으니, 바로 점성학(분화)과 연금술-알키미아(진보)입니다. 카발라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적 토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점성학은 근원적 힘이 분화하여 ‘실재화’하는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점성학에서 탐구하는 차원은 (카발라 용어로) 예찌라계와 앗시야계입니다. 특히 힘의 구체적 실재화 국면인 앗시야계에 집중됩니다. 우주적 힘은, 우리의 혼 및 아스트랄계와 관련해서는 공간의 개념으로, 물질계의 측면에서는 시공간의 개념으로 실재화합니다. 점성학은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밀도와 형태, 영향력의 종류와 세기, 순수성과 복합성의 정도 등 우주적 힘의 실재화 과정이 점성학 개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편 실재화되고 구체화된 힘들, 광물의 형태나 식물의 형태나 동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에너지 복합체를 거르고 걸러 순수 힘의 결정체를 뽑아내는 학문이 알키미아(연금술)입니다. 다루는 차원에 따라 다른 방식의 정련법이 필요하겠지요.)

고대 이집트인이나 수메르인들은 이러한 목적과 배경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발굴 보존된 유물들이 그 증거입니다. 이 두 문명의 오랜 교차 혼합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는 실증적 사실이므로 자세하게 거론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거대한 융합 용광로 이전부터, 창조와 진화, 대우주(세계 전체)-소우주와 관련해 동일한 열쇠를 쥔 사제-왕들의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스트랄계와 멘탈계를 오가는 것이 예삿일인 사제들에게는 특별한 물리적 교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바빌로니아, 히브리 등)의 점성학은 동일한 핵심을 공유한 두 체계에서 뻗어 나온 가지입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물질 우주와 별은 신의 대리자였습니다. 근대 유물론자들은 이 ‘미신적 관념’을 깨부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신이란, 근원적 힘의 실체를 가리키는 아이콘이며 힘의 진화 국면에 따라 다른 양태와 속성을 갖는다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의 미신 타파 노력이 얼마나 반(反)유물론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전근대적 ‘미신’에서 벗어나는 순간, 점성학은 실체 없는 통계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물론, 자연법칙은 신의 의지가 물질화된 현상이며, 이를 탐구하는 일은 힘의 실체를 유추할 근거를 마련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통계를 통해 본질을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유추를 통해 개연성을 밝힐 수 있을 뿐입니다. 관측의 발달과 함께 점성학은 시각의 제한이라는 미궁에 들어섰습니다. 사실, 사제권력과 왕권이 분리되고 권력이 왕권에 집중되면서 사제-왕의 전유물이었던 점성학은 다른 방법, 말하자면 세속적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관측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관측은 왕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통치를 위해 신=자연의 뜻을 읽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리스 로마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형이상학적 토대는 신화적 명칭이라는 상징에 밀봉된 채 남겨지게 되었지요.

아무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이 만들어낸 점성학적 산물은 양상이 다릅니다. 시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랄까요. 이집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에서, 특정 시공간 즉 ‘지금 여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의 점성학은 특정 시공간에 물질화되는 힘의 실체에 집중했습니다. 신전의 포지셔닝과 배치, 피라미드의 방향과 형태가 모두 점성학적 탐구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피라미드나 미라가 ‘지금 여기’라는 개념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자의 서>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고대 이집트인에게 죽음은 여전히 ‘지금 여기’ 라는 시공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한 관측을 통해 물질 우주에 드러나는 힘의 실재화 과정을 연구하고, 자연법칙 즉 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통치의 척도로 이를 활용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중적 왕권이 확립되어 있던 이집트에서 자연법칙을 ‘아는’ 왕은 신의 대리자였습니다. 자연법칙에 도사리고 있는 위계가 강조됐습니다. 신의 대리자는 시간을 정하고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원인적 힘인 신에 대한 탐구는 사제 집단에 의해 이어졌습니다. 이 둘의 미묘한 통합이 이집트 점성학의 특징입니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격변과 전쟁이 빈발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예측’과 ‘예언’이 점성학의 주된 관심사였지요. 물론 개인은 예측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신의 뜻을 알고 통치하는 집단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날씨를 예측하고 전쟁 결과를 예측하고 왕조의 몰락과 탄생을 예측하는 것이 점성학의 목적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신의 뜻이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수메르인이나 고대 바빌로니아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의 때’를 아는 것이 중요했지요. 관측에 비해 분석이 강조된 것은 이 같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60진법은 관측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10진법을 사용한 이집트인이 60진법을 사용한 바빌로니아인에 비해 공간가치체계(place-value system)이 뒤떨어진다는 Tamsyn Barton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바빌로니아 점성학 유물에는, 관측하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의 구현으로 이어지는지 찾아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힘의 작동 원리를 이미 알고 있던 사제들은 간단한 매뉴얼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말하자면, “뉴문이 질 때 속도가 느리면 왕국에 무슨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식입니다. 이 쐐기문자 자료들을 보고, 당시 분석과 예측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측 방법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고유 역할을 쥐고 있었습니다. 가설입니다만, 이들 중 일부가 사제집단의 영역 밖에서 돈을 받고 개인의 일생을 예측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주류 점성학은 이처럼 예측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세계 지배 이후 형성된 흐름이지요. 또한 그리스 로마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개인의 천궁도를 만들고 개인의 일생을 예측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측 기법은 이에 상응한 쪽으로 치우쳐 발달하게 됐습니다. 개인적 목적으로 점성학을 활용하는 것은 진화의 방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관측이라는 물질적 증거 수집 방법을 확보하게 된 점성학은 점차 신탁과는 별도의 위상을 점하게 됐습니다. 이 같은 목적으로 제한된 시각에서 볼 때, 점성학의 뿌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예측 점성학이 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성학은 여전히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라는 헤르메스학의 정언에 기반을 둔 학문입니다. 이때 ‘위’는 물질 우주의 하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점성학의 목적과 연구방법을 바로잡는 우선 과제입니다.
앗시야계에서 벌어지는 힘의 실재화는 그 상위 차원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상위 차원의 법칙을 가리켜 우리는 운명이라 부릅니다. 물질 우주의 별자리와 루미너리 및 행성과 4원소 원리는 그 힘의 자취이자 대리자 격인 힘의 센터들입니다. 자연법칙의 중심입니다. 동일한 질료의 힘의 센터들이 우리 자신 안에도 존재합니다. 그 상응과 공명을 연구하는 것이 점성학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정확한 예측도, 예측한 결과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여기서 출발합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의식마법의 목적과 마법서에 대한 소고




의식마법의 목적과 마법서에 대한 소고
<소환마법실천> <마법서, 즉 마법일지>편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1. 서론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일기를 가리켜 ‘개인적 마법서’라고 단언한다.[1]  마법작업의 모든 과정, 즉 작업 목표, 조건과 준비사항, 실질적인 작업 내용, 결과, 사후 작업 등에 대한 세세한 개인적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출을 꺼려 주요 내용을 코드화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역사적으로 마법서를 신비화하고 이 낯선 문자들의 조합을 주문이라 오해하여 의식마법의 열쇠라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2] 

마법서에 대한 이 같은 비판적 접근은 마법서를 ‘개인적인 작업일지’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마법의 역사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과거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마법을 실행하는 수많은 마법사 또는 마법사 지망생들이 이 명제에 발끈할 것은 자명하다. 상위 차원의 힘과 만날 핵심적 열쇠에 대한 ‘믿음’을 일거에 흔드는 폭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의식마법과 그 공식(주문)을 마법의 ‘전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법서(그리무아르)의 진면목을 폭로한 프란츠 바르돈의 입장을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할 개념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의식마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의식마법이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이때 주문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정리가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그의 비판적 접근이 사실이라면 실존하는 마법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관점에서 그 기록을 파악하고 분석할 것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소환마법실천>과 그 앞뒤로 저술한 그의 책, <헤르메스학입문>과 <진정한 카발라 열쇠>에 제시된 핵심적 단초들을 중심으로 위의 문제들을 살펴보고, 의식마법의 목적과 마법서의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기초로 ‘나만의 마법서’를 기록하는 이유와 방향을 정립할 것이다.        

2. 본론

(1) 의식마법의 목적과 작동 원리

의식마법은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특정 에너지를 끌어오기 위한 ‘자동화 작업’이다. 즉 “특정 동작이나 마법 의식, 심상화나 특정 에너지가 자동적으로 효력을 일으키도록”[3]  하기 위해, 그 과정을 공식화하여 반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고안해 놓은 공식이다.

“특정 동작이나 마법의식을 반복해서 심상화하면, (즉 공식화된 동일 과정을 반복 작업하면,) 아카샤의 원인적 영역에 에너지가 저장되며, 소망이나 목적에 각각 필요한 진동(전자기적 흐름), 색깔, 소리, 그 밖의 필수적인 것들과 상응하게 된다. … (중략) 반복을 통해 이 저장소를 충전시키면, 마법(의식만)으로도 에너지의 한 부분이 흘러나와 필연적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4] 키스케일(진동, 색깔, 소리 등)에 맞추기만 하면 이미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동일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에너지(힘) 또는 존재를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마법의식 또는 예배나 제식 등은 모두 이와 동일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5] 

이때, 특정 에너지라고 칭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힘들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함이므로 상위 차원의 밀도 높은 힘을 접촉하고 끌어오려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의식마법의 목적은,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상위 차원의 힘(즉 존재)과 접촉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공식화 작업’이다. “충전이 다 된 배터리로 전기를 얻고 싶을 때 할 일은 그냥 접속하는 것뿐이다.”[6] 의식마법의 매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비유다. 누구나 코드를 꽂을 수 있으며 그 전기를 마음대로 꺼내 쓸 수도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만드니 말이다. 동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2) 공식의 구성 조건

결국 문제는 이러한 공식을 ‘아무나’ 활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 자동화 공식의 핵심은 각각 필요한 진동(전자기적 흐름), 색깔, 소리, (즉 키스케일) 그리고 그 밖의 필수적인 것들의 구성에 있다. 상위 차원의 해당 에너지를 ‘움직이게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주파수의 공명을 일으키는 요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상화와 함께 이 공식을 반복 실행하여 자동화 시키는 것은 물론, 원인적 세계인 아카샤에 등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등록된 공식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원인 중의 원인 ‘아카샤’로부터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 과정은 인과법칙이라는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우주보편법칙 중 가장 근본적인 법칙인 것이다.  

한편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구성된 공식과 동일한 키스케일이 필요하다.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해내는 ‘작용 일으키기’ 작업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확한 포인트는 ‘소리’ 즉 ‘말’이다. 4극자석인 인간이 신의 권위를 입고 창조를 모방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 있다. 프란츠 바르돈의 그의 세 번째 저서에서 모든 문명권의 ‘카발라’가 바로 이 핵심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소리와 문자로 이루어진 키스케일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3) 주문의 역할과 오해

바로 여기서 ‘주문’에 대한 환상이 비롯된다. 아무나 의식마법이라는 공식을 활용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며, 특정 주문만 읊으면 상위 차원의 힘(존재)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마법서(그리무아르)들이 주문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있어서 마법서만 손에 넣으면 그 주문을 활용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무아르의 주문이 이러한 오해의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은, 마법서를 기록한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법작업 과정을 암호화한 데 있다. 암호화된 문자 조합이 갖는 ‘낯설게 하기’가 실행과정 중 작업자의 의식을 집중상태에 이르게 하며, 의식이 정상 상태에서 벗어나 황홀경에 빠짐으로써 환각 작용을 일으킬 여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7] 결과는 간절히 원하는 자신의 소망대로 엘리멘털 심지어 형상을 갖춘 엘리멘터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상위 차원의 힘 또는 존재라고 오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주문은 발음이나 소리를 흉내내는 것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진정한 카발라 열쇠>에서 프란츠 바르돈은 공식화된 소리의 핵심이 ‘진동’의 형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비의를 품고 있는 각 문명권의 카발라들은 ‘신의 이름’을 통해 진동을 공식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바르돈은 “자신의 의식을 특정 영역으로 이동시킬 때 그 영역의 ‘신의 이름’ 중 적합한 명칭을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이름은 두뇌의식의 연상을 돕는 보조도구일 뿐이다. 진정한 마법사에게는 이런 식의 신의 이름이 없어도 된다.”[8]고 말하고 있다. 즉 포인트는, 신의 이름 자체가 지닌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동 자체에 있다는 말이다. 이 진동은 심상화나 공명이 가능한 다른 소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히브리 신의 이름이든, 힌두 신의 이름이든, 라틴 신의 이름이든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따라서 주문이란 “필요 수준에 이른 마법사의 연상 보조수단, 즉 그 마법사가 마법의식을 실행하기 위해 도식화한 설계도”[9]이다. 접촉할 특정 존재, 힘, 계(영역)와 동일한 진동을 만들고 움직일 방법을 설계한 공식이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키스케일의 여러 측면, 즉 전자기적 흐름의 여러 측면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마법사가 자신의 마법 작업 과정을 암호화시킨 코드를 읊조리기만 하면 되는 주문으로 오해하고 그것만으로 상위 차원의 힘과 만나려 하는 경우 실패는 자명한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절한 열망에서 비롯된 엘리멘탈이나 엘리멘터리를 만들어내고 성공했다고 오인하는 경우 곤란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바르돈은 이렇게 경고한다. “마법적으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의식마법을 실행하지 말라는 경고다.”[10]    

(4) 마법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 

마법서가 개인의 작업 일지라는 말이, 마법서에 아무런 열쇠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암호화되어 있을 뿐이다. 바르돈에 따르면 마법 공식을 기록한 주문서는 “의식마법을 실행하는 마법사의 마법일지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일지에 자신의 작업과정을 단계별로 기록해 나가면,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서 마침내 목표에 이르게 된다”[11]고 말한다. 또한 “이 지식을 손에 쥐고 있던 사람들은 소위 ‘주문’이라는 다양한 코드명을 고안했고, 한편 이러한 주문을 해독할 열쇠는 입문자에게만 주어졌다.” [12]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해독할 열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비입문자가 이 주문서를 손에 넣는 경우, 그는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13]

우리에게 마법서는 의식마법 작업이 실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진정한 마법사는 수많은 책에 나오는 다른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마법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마법원을 그린다 해도, 그것이 무한함, 신성함, 금계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해도, 정령과 천사를 마법원 안으로 불러들여 보호막을 만든다 해도, 또 라마승들이 만다라를 그리며 수호신인 타타가토스를 부른다 해도,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마법사에게는 낯선 외부적 가르침이 필요없다. 이들 가르침은 단지 영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관념과 기억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14]


3. 결론

그러나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아카샤에 기록된 ‘공식’ 또는 주문으로서의 의식마법은 쉽게 특정 힘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의식마법의 매력이 있음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공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공식 및 방법을 찾아 실행하지 않은 채 흉내내기에 급급한 경우, 의식마법의 이 매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때 나타날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식을 성공시키지 못한다. 흉내내기에 그치거나 엉뚱한 판타스마 따위를 만들어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은 이미 위에서 지적했다.

둘째, 설사 성공한다 해도 (만든이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경우) 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에너지를 도둑질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바르돈은 이 일을 이렇게 단정한다. “도덕적인 마법사는 이런 행위를 도둑질이라고 여기므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15] 

셋째, 공식을 만든이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한 경우다. 이때 믿을 만한 안전장치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남의 에너지 저장소를 채워주는 바보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의식마법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위의 지적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무아르에 기록된 공식들은, 저자의 작업 일지일 뿐이다. 자신의 속성에 알맞은 작업 조건을 분석하고 찾아나간 과정의 기록이며, 원하는 상위 차원의 존재, 힘, 계에 접촉할 수 있는 키스케일을 찾아나간 과정의 기록이며, 이 모든 것은 기록자의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법칙의 어느 지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의식마법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기존 마법서의 작업 과정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의식을 설계해야 한다. 초심자가 일정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 단순한 마법의식을 실행할 때는 안내자의 지도에 따라 안전장치를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LBRP나 MPR를 실행할 경우) 또한 작동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자기만의 마법서, 즉 마법일지에 실행할 때의 특정 조건과 과정 및 결과를 기록해 자기만의 ‘영역대’를 찾아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마법일지를 성실하게 작성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이 모든 작업은 영-혼-육의 기본적 발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다. 의식마법의 목적은 상위 차원의 힘에 접촉인데, 자신의 실행 결과를 확인하고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마법의식의 설계는 ‘호드Hod’의 영역에 속한다. 호드의 능력을 여는 열쇠는 “모든 현현물과 현상들을 조종하는 영적인 힘에 대해 인식하는 것”[16]이다. 호드의 상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위 차원의 힘에 붙인 ‘이름’인데, 이때 “이름은 ‘능력의 단어’로서, 이것을 통해 마구스는 베네 엘로힘의 다양한 힘을 개괄하고 자신의 의식 안으로 불러낸다. 이 이름들은 (중략) 일종의 철학적 공식이다. (중략) 그들의 이름은 힘 자체를 나타내는 이름이거나 복합적인 힘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된 상징에서 나왔다.”[17] 다이온 포춘이 강조했듯이, 오직 제1원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통해서만 힘의 이름들, 즉 주문 또는 공식의 유추가 적법한지 여부를 가려낼 수 있다. 따라서 마법의식의 설계는 호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드의 능력을 불러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영-혼-육 훈련 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마법일지 작성을 통해 이 설계 작업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힘의 원리와 작동 조건을 분석할 데이터를 축적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마법일지의 기본 형식, 즉 행성 특히 루미너리의 위상, 영-혼-육의 컨디션, 훈련 목표, 훈련 내용 및 과정, 결과 등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 요구되는 것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지혜의 32경로




쎄페르 하예찌라(Sefer ha-Yetzirah) : 지혜의 32경로

카발라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분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카발라 책 중 으뜸을 꼽는다면 <쎼페르 예찌라>일 것입니다. 헤르메틱 카발라를 공부하는 경우에도, 카발라의 기본구조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대 카발라, 그리고 <쎄페르 예찌라>를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며 정리된 카발라의 기본구조는 10세피로트와 22경로, 즉 32경로라 일컫는 힘의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경로들은 창조의 과정과 우리 의식의 단계를 표상합니다.

10세피로트는 1~9까지의 기본 숫자(digit)에, 22경로는 문자(즉 히브리어 알파벳)의 ‘소리’를 골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중에서도 22경로는 힘의 내용(contents)을 나타내는 질(質,quality)입니다. 따라서 주관적입니다.
지금은 헤르메틱 카발라에 의해 정교하게 실천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반면 유대 카발라에서는 그 중요성이 반감된 경향이 있지만, 각 경로는 의식의 국면(상태, states)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대 유대 카발라로부터 전해지는 ‘지혜의 32경로’는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전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면 영어로 번역된 책 중에서 골라 공부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영어 번역본 중에도 오류가 많으므로, 몇 권을 비교하며 연구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각 경로에 대한 실천적 경험이 있다면 이 문구들은 자명하게 이해되겠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세피라와 세피라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지도를 찾듯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히브리어 알파벳과 상응시키며, 그 힘의 속성이 무엇인지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각 세피라는 대표 키워드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왕관”, “영광” 같은 단어로 특정 세피라를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주관적 관점에서 각 경로의 내용을 ‘의식의 국면-상태’라는 측면에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전에 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또한 경로에 알파벳을 상응시킨 구조도에는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만, 유대 카발라 버전을 놓고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 지혜의 32경로
(Aryeh Kaplan의 주해서 부록을 참고해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시스 정은주)

1~10 경로(10세피로트)는 미스티컬 카발라 중 개별 세피라 맨 앞의 키워드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11번 경로 :  매의 눈으로 쪼아보는 상태
이 경로는 ‘베일’(이 체계에서 정해 놓은)의 본질이다. 11번 경로는 경로들 사이의 관계를 대표하며,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원인 중의 원인(Cause of Causes)’ 의 면전에 서게 된다.

12번 경로 : 맹렬히 타오르는 상태
이 경로는 ‘위대한 왕(Greatness)‘의 전차-바퀴(Ophan-wheel)’의 본질이다. 이를 가리켜 ‘눈앞에 실현시키는 자(Visualizer)’고 부르는데, ‘볼 수 있는 자들(Seers)’은 여기서, 실현된 것을 ‘비전’으로 보게 된다.

13번 경로 : 의식을 통제하는 합일 상태
이 경로는 ‘영광(Glory)’의 본질이다. 합일한 영들(spiritual beings)이 진정한 본질을 성취함을 나타낸다.

14번 경로 : 깨달아 환하게 빛나는 상태
이 경로는 ‘침묵의 소리(Speaking of Silence)’의 본질이다. 이 경로에서는 거룩한 비밀과 그 구조에 대한 비의적 가르침을 얻게 된다.

15번 경로 : 견고하게 하는 상태
이 경로는 “순수의 어스름(Glooms of Purity)” 안에서 창조의 본질을 공고히 하는 상태다. (이론 분야의 마스터들은 이것이 바로 시나이산의 자욱한 연기라고 말한다.) “연기는 곧 그의 덮개요” 라는 뜻이다.

16번 경로 : 참고 견디는 상태
이 경로는 “영광(the Glory)의 기쁨(Delight)”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가장 낮은 상태다. 이를 일컬어 에덴 동산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성자를 위해 (상으로) 예비된 곳이다.

17번 경로 : 감각(the Sense)의 의식 상태
이 경로는 신실한 성자를 위해 예비된 곳으로, 성자들은 여기서 거룩함을 입는다. 천상의 존재(the supernal Entities)에 속해 있으며, 이를 가리켜 ‘아름다움(Beauty)의 토대’라 부른다.

18번 경로 : 유입물 저장소에 관련된 의식 상태
이 경로를 탐사하는 경우, ‘원인 중의 원인’의 그림자에 거하는 자는 여기서 감춰진 비의와 암시를 건네 받으며 ‘원인 중의 원인’으로부터 유입된 질료를 철저히 캐낼 것을 맹세한다.        

19번 경로 : 모든 영적 활동의 비의에 관련된 의식 상태
이 경로는 ‘지고의 축복(blessing)’과 ‘가장 높으신 영광’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유입을 가리킨다.

20번 경로 : 의지(Will)의 상태
이 경로는 형상을 입은 모든 것의 구조다. 이 의식상태를 통해 우리는 ‘근원적 지혜(Original Wisdom)’의 본질을 알 수 있다.

21번 경로 : 열망하고 구하는 상태
이 경로는 신성의 유입을 수용하는 상태로서, 이를 통해 모든 존재는 신의 축복을 받는다.

22번 경로 : 신실한 상태
영적인 힘이 강화되는 상태로, 이를 통해 “그림자 안에 거하는” 모든 존재에게 접근할 수 있다.

23번 경로 : 지탱하는 상태
이 경로야말로 모든 세피로트를 지탱하는 힘이다.

24번 경로 : 환영의 상태
이 경로에서는 만들어낸 모든 환영이 각자의 위상에 걸맞은 형태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25번 경로 : 시험을 겪는 상태
신은 여기서, 부름받은 자들이 근원적 시험을 겪게 한다.
 
26번 경로 : 거듭나는 상태
‘복되신 거룩한 이(Blessed Holy One)’께서 창조를 통해 구현한 만물을 새롭게 함을 의미한다.

27번 경로 : 지각력이 있는(palpable) 상태
상위 차원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지각력도 물론 포함하여) 이 경로를 통해 창조되었다.

28번 경로 : 자연의 의식 상태
해 아래 존재하는 (태양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의 본성은 이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29번 경로 : 물질적 의식 상태
이 경로는, 각 영역별 시스템에 따라 물질화된 것들의 발전에 대해 설명한다.  

30번 경로 : 보편화하는 의식 상태
이 경로를 통해, “천국을 퍼뜨리는 자”는 각 영역의 전차 바퀴에 대한 지식을 이론으로 정립하면서 별과 별자리에 대한 지배력을 끌어올리게 된다.

31번 경로 : 중단 없는 의식 상태
이 경로는, 자연법칙에 따라 태양과 달이 각자 최적의 궤도를 유지하도록 태양과 달의 경로를 관리한다.  

32번 경로 : 예배 상태
이 경로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일곱 행성을 예배하는 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예비된 경로이기 때문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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