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 위에서, 패쓰워킹

<카발라Ⅲ : 경로> 개강 강좌를 준비하며

​네 길을 가라, 길을 찾다, 길을 열다, 길이 열리다, 길이 닿다, 길을 트다, 길을 닦다, 길 위에 서다, 길을 알면 앞서 가라, 갈 길이 멀다, 극락 길 두고 지옥 길 간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 저승 길, 헤어날 길, 살 길, 험한 길, 한 길…

‘경로’라고 하면 뭔가 어렵고 심오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 우리는 ‘경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우리말로 ‘길’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 걷거나 차로 이동하거나 수레나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것을 길이라 합니다. 목적지까지 이어져 있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많은 것들의 이동 변화 운동 스토리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길’이 완성됩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길은 점점 닫히고 쇠락하여 더 이상 길이 아니게 됩니다.

물질적 공간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즉 감성적·정신적 영역에도 길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오컬티즘에서 ‘길’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무게를 갖습니다. 왜냐 하면…

위에 나열한 ‘길’들은 삶의 대목마다 실재화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누군가 이미 닦아 놓은 것이 대부분이죠. 우리는 찾고 발견하여 목적지까지 걷거나 달립니다. 물론 새로 길을 내고 닦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개척자들이지요. 오컬티즘에서는 이와 같이 새로 길을 닦거나, 생경한 샛길을 다듬고 표지판을 설치하여 번듯하고 편리한 길로 만드는 개척자들을 구루, 현자, 스승, 성인 등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완벽한 새 길’을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방출’과 ‘창조’의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흔적은 한 점 한 획도 사라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지혜의 스승들은 그 창조의 경로를 되짚어 길을 개척할 따름입니다. 자연의 지형을 따라 물질계의 길이 난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 영이 다른 것, 이왕이면 상위 차원의 힘이나 시공간에 닿기 위해서는 창조의 기록, 방출의 경로를 따라가야 합니다.

물론 크고 번듯한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험준하고 좁은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오직 까르마 인과법칙에 따라 목표를 선택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체계(God system)를 선택하는 것이 입문의 가장 중요한 기로라고 마스터 바르돈이 강조하잖아요? (헤르메스학입문)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리고 먼저 가 본 자, 즉 스승은 그 길을 안내하고 살펴 줍니다. 수호자는 적합한 체계를 선택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승은 체계의 정해진 경로를 따라 제자의 대목대목 입문을 안내합니다.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대신 가줄 수는 없지만,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그리고 기로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내합니다. 먼저 가본 자들은 뒤따를 자들을 위해 표지판도 세우고 안내자를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가로놓인 ‘관문’을 열고 들어서게 하는 겁니다. 이것을 입문이라 하지요. 입문에서 스승은 그 길의 본디 형상, 즉 에너지 속성을 경험하게 하고 그 경로의 모든 힘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흔히 말하는 ‘패쓰워킹’은 이와 같은 <에너지 경험> 작업입니다. 원래의 경로는 방출의 흔적에 따라 생긴 지형지물일 것이에요. 스승들은 길을 넓히고 이미지화하였으며 힘을 세련되게 다듬어 놓기도 했고 표지판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습니다. 표지판은 해당 힘과 상응하는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패쓰워킹 기법도 남겨 놓았습니다. 꿈 작업, 이미지네이션, 명상을 통한 내면화 작업,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작업, 투사 등등. 어찌 됐든 힘의 표출물을 지각-경험하는 모든 방법이 동원됩니다.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내면으로 들어가든, 영화 <애드 아스트로>에서처럼 외재화 작업을 행하든, 동일한 지각-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무의식 저변은 온우주가 공유하는 공동의 창고이니까요. 아무튼 모든 패쓰워킹은 안내하는 스승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 길이나 우왕좌왕 다녀볼 수는 있지만, 헤매고 싶지 않다면 제대로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다면 지도나 안내자는 필수적입니다. 게다가 이미 들어선 길에서 경험하고 행동한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는 이쯤 하여 끝!

사실 모든 경로는 입문을 통하여 그 힘을 경험-지각한 이후부터, 삶의 경로 자체가 됩니다. 그 힘을 온전히 알기 위해 집중적으로 그 진동에 노출되어 경험할 수 있도록 온우주가 배려하는 것이지요. 그 길을 설계하여 내어준 주인, 신체계가 마구마구 지원합니다. 만나게 되는 책, 만나게 되는 사람, 쾌와 불쾌의 모든 사건들, 끌리는 음식과 색깔. 몇 번의 의도된 ‘패쓰워킹’으로는 절대 온전히 그 힘을 알 수 없겠지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며, 이를 기반으로 행위의 방향을 선택하니 말입니다.

카발라 22경로는 존재양식이자 먼데인 에너지 센터 <세피로트>로 모이고 흩어지며 방출의 경로를 경험할 수 있게 열어 줍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방출-창조의 흔적, 그 길의 특징, 이어지는 목적지들, 길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각 가능한 표지들. ‘카발라’라는 지도 위에 이들 기호가 있습니다. 카발라를 공부하는 목적은 이들 기호를 완전히 습득하여 지도를 손에 쥐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집필 중인 <카발라강좌(가제)>에서 한 대목을 발췌합니다.


카발라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는 서슴없이 ‘로고스’라 할 것이다. 첫째 통합원리이자 법칙으로서의 로고스이며, 둘째 법칙에 따라 힘을 방출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이며, 셋째 방출된 힘의 실재화로서의 로고스이며, 넷째 실재화된 힘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로고스이다. 태초의 말씀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로고스다. 인간의 선험적 지성 즉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는 넷째에 해당된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이와 같이 로고스라는 통합체계를 통해 매개된다.

​결국 로고스로서의 카발라는 테우르기아Theurgia 즉 신학이며, 대우주에 존재하는 힘의 계열과 질서를 파악하는 우주론이며, 현존하는 실재 즉 끝없이 변화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만물의 존재론이며, 대우주와 소우주의 매개원리를 통해 신과 합일하고자 하는 진보시스템이다.

(중략)

구약성서 창세기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따라 빛이 생겨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 즉 영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함으로써 성취된 결과물, 다시 말해 힘의 방출과 운동의 결과물이 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며 실재한다. 에너지의 실체로서 빛이 실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운동과 변화는 한 획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전우주의 존재양식이다. 자연과 인간도 그 운동의 일부요 그 기록의 하나다. 이를 탐구하는 것이 존재론으로서의 카발라다.

​소우주인 나 자신의 안팎이 모두 그와 같이 이루어졌다. 이 거시적인 세계 속에서 지금 나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나 자신이 대우주 창조-진화의 모든 과정 모든 국면 모든 순간인 것이다. 그 시간과 공간이 나임을 온전히 자각할 때 이를 가리켜 ‘합일’이라 한다. 합일을 향한 길paths 즉 체계가 곧 카발라다. 만일 세계의 펼쳐짐, 그 모든 과정, 전체로서의 원인, 그것과 하나되는 ‘나’가 없다면, 그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카발라라는 학문은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다. 구전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무릎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하여 목소리에 핵심을 담은 채 지금까지 전해져 왔을 리가 없다.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희열을 느낄 때까지 다듬고 다듬는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의 안팎이 원초적 힘과 하나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카발라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카발라강좌(가제)> 정은주 집필 중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Silver Spring’ 칼럼 발췌

[칼럼] 마법생활백서 : 향을 태우다, 인센스편


[완전궁금 Q.1]: 대체 향을 왜 태우는 거죠? 수행만 하면 됐죠. 수행할 때마다! 깨끗이 씻어라, 로브 입어라, 일지 준비해라, 전기불 꺼라, 정말 할 게 많은 것 같아요. 전기불이 없으니 양초를 찾아 사용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인센스까지? 그건 좀 이해가 어려워요. 대체 왜 태워야 하는 거죠? 태우면 수행이 잘 되나요? 그런 향도 있나요? 

[이시스홀 A.1]: 향 연기가 싫으면 안 태우면 그만이죠. 왜 이리 난리래요. 그래도 제대로 수행하려면 태우는 게 정석입니다. 뻔한 말인 것 같지만 인센스는 좋을수록 좋은 거예요. 마법사는 인센스를 까다롭게 구별해요. 좋은 인센스는 매캐한 인공향이 없는 것을 말해요. 그래야 호흡건강도 지킬 수 있잖아요. 천연향기도 즐길 수 있고요. 그러니까, 향은 좋은 것으로 써야 해요. 그래야 신도 마법사도 모두 만족할 거예요.

[완전궁금 Q.2]: 아이~참! 그러니까, 왜 향을 태우냐고요. 그걸 말씀해주셔야 해요!

[이시스홀 A.2]: 앗! 제 정신 좀 봐요. 호호. 흔히 제단 위 캔들은 낮과 밤의 경계, 신의 얼굴이라 하잖아요. 그러면 인센스는 뭘까요? 마법사의 향기며 마법사의 권위가 되는 것이죠. 이보케이션, 즉 소환의식을 할 때 말이예요. 초대하는 엔터티의 사정을 고려하잖아요. 여기 향도 그래요. 초대하는 엔터티가 화성 존재라면 응당 시나몬 인센스를 태워 존재가 편히 의식에 임할 수 있게 해야 해요. 이게 배려죠. 그래야 매너있는 마법사라는 소릴 들을 수 있어요. 첫 소환이면 특히 인센스 사용에 신경써야 하고요. 이런 건 마법의 기초랍니다. 마법교과서에 다 나와요.

[완전궁금 Q.3]: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을 풀리지 않았어요. 저는 아직 소환할 생각이 없어요. 아직 초심자라 기초 수행하기만 해도 빡빡한 걸요. 그러니까, 인센스는 소환이 가능할 때까지 장롱에 넣어두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죠? 소환에 그렇게 사용하다는 말이죠? 그럼 저는요? 저는 초심자예요. 이제 겨우 정신집중 같은 명상만 겨우 한단 말입니다. 리추얼이라고는 오프닝 리추얼이 다예요. 그럴 때도 꼭 향을 써야 하나요? 말해주세요. 제발.

[이시스홀 A.3]: 그럼요. 마법사가 뭘 하든 그곳이 신전이라면 수행 장소라면 태워야죠. 향. 일반 수행이라면 좋아하는 향을 태우면 그만이예요. 좋아하는 향이면, 그것이 유난히 땡기는 향이면, 질문자와 꼭 닮은 향일 거예요. 그 인센스의 성분이 질문자와 꼭 닮은 오라를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좋아하고 그래서 땡겨할 수 있겠어요. 마법상응법칙을 몰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 향이 있으면 바로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꾸 인센스를 태우는 까닭을 묻네요. 글쎄요. 꼭 태워야 할 이유!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답을 달라질 거예요. 인센스가 필요 없는 마법작업도 분명 있으니까요. 우리가 인센스는 태우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같아요. 우주섭리께 구조요청(S.O.S.)하는 거예요. 급하게 도움이 필요하니까, 양초를 밝혀 신을 찾아야 해요. 촛불로 신과 나, 세상과 제단의 경계를 밝혀야 해요. 여기 인센스도 필요해요. 연기를 피워 신께 연락하는 거예요. 캔들과 인센스는 정성이라 그랬어요. 간절히 빌며 기도해야죠. 그런 마음으로 수행해야죠. 부디 신께서 날 발견하도록!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캔들과 인센스는 그런 염원에서 출발해요.  

[완전궁금 Q.4]: 우와, 감사합니다. 그랬군요. 그런 뜻이 있었군요. 죄송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초심자예요. 수행할 때만 향을 태워요. 그래도 되나요? 신께 바라는 거 없이 수행했단 말이예요. 크게 믿고 신앙하는 신이 없을 때, 아니 신을 정하지 못했을 때, 자연섭리께 기도하라고 들었어요. 그러면 부담 없어요. 우주보편법칙께 기도하는 거 좋아해요. 그러면 섭리께 기도하고 수행을, 아니다. 캔들하고 인센스 태우며 신께 기도하며 수행하면 되는 거겠죠?

[이시스홀 A.4]: 그럼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모두 그렇게 하는 걸요. 그래야 수행하는 모습, 주님도 보시고 수호자도 함께 하죠. 신께 기도한 것처럼, 수호자 선생님께도 부탁해야 해요. 기도하고 부탁해야 수호자께서 넉넉히 도우십니다. 뭐든 말을 해야 해요. 표현은 정말 중요한 거랍니다. 그래서 리추얼매직도 ‘이전 것’을 모방하고 재현하고 나름대로 상황을 묘사하잖아요. 그게 다 ‘힘을 그리는 행위’예요. 스승께서 그려 선배가 성취한 그대로 따라하기, 그게 마법이죠. 마법은 그렇게 끌어내는 것입니다. 한편 인센스는! 해당 마법의 목적을 매개해요. 마법의 목적을 돕는다, 이 말입니다. 작업의 목적이 수행이라면 수행의 걸맞는 인센스를 태우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인센스는 마법깃발, 즉 목적의 선봉이 되는 거겠죠.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어때요? 아무거나 태울래요?

[완전궁금 Q.5]: 아니, 그냥 수행을 돕는 것도 아니고 목적의 선봉이 된다고요? 그래서 매개도 한다고요? 헐, 그런 줄 몰랐네요. 그럼 어쩌요? 뭘 태워야 좋은 건가요? 좋은 향이란 무엇을 말하나요? 제가 좋아하는 향기를 좋은 향이라 하면 되는 건가요? 향 종류는요? 아아- 모양! 어떻게 생긴 향이 좋은 향이죠? 스틱도 있고 원뿔모양 향도 있어요? 뭐가 좋은 거죠?

[이시스홀 A.5]: 워워! 진정해요. 뭘 태워야 좋냐고요? 글쎄요. 일반 수행이면!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인센스를 사용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마법을 몰라 전통을 묻는 거라면! 이것이 수행용이라면! 샌달우드(백단향)를 추천해요. 샌달우드는 아까샤에 상응하잖아요. 그러니까, 무리 없이 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센스예요. 백단향은 명상할 때도 좋고 생명나무 중앙기둥 패스워킹할 때도 좋아요. 크게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샌달우드는 많이들 즐겨 사용해요. 좋은 향이라면! 인공향이 첨가되지 않은! 그러니까 공장에서 마구잡이식으로 제작하지 않은 인센스를 말해요. 인공향은 정말로 매캐? 아니 불쾌해요. 이따금 목구멍도 따갑고요. 아무튼 별로예요. 적어도 인공향이 아닌 천연향 그대로 제작된 인센스가 좋은 인센스예요. 인센스가 스틱이든 콘이든 좋은 향을 찾는 거라면 재료부터 따져야 해요. 그래도 저는 스틱을 선호해요. 콘은 뭔가 잘 안타요. 혼자 타다 마는 일이 빈번했거든요.

[완전궁금 Q.6]: 그러면 저도 스틱향을 써야겠네요. 무조건 백단! 샌달우드로 하겠어요. 그래도 이런저런 쓰임새가 있을 텐데요. 상응법칙을 모르니 답답합니다. 또 좋은 재료만 엄선해서 태우리라 생각하니 금액부터 걱정됩니다.

[이시스홀 A.6]: 이제는 가격이 걱정? 재료가 좋으면 그만큼 비싸지는 법이예요. 아무리 인센스가 마법사의 권위를 나타내도! 음- 여기부터는 정성의 영역이라 해야겠어요. 주머니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세요. 그게 서로 편할 거예요. 돈걱정 없을 때면 이것저것 될수록 많이많이 태워보세요. 뭐든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또한 좋은 재료라고 해서 모두 비싼 것만은 아니예요. 옛날 그리스-로마식 신전 떠올려 보세요. 향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신전이요. 이집트-바빌론 신전의 향연기는 또 어땠고요. 솥에 숯을 피워 놓고 세상 좋다는 온갖 재료를 몽땅 태웠잖아요. 숯 위에 마른 장작과 마른 뼈를 태우고 소며 닭이며 염소며 뭐든 고기를 올려 태웠고 마당에 살아있는 허브와 꽃과 온갖 신비로운 약재를 모두 태웠죠. 그러면 신전 향이래요. 음- 전 잘 모르겠어요. 실제로 따라해본 적이 있었는데 매캐하기만 하던 걸요? 집중은커녕 모락모락 연기 때문에 이완조차 어려웠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뭐든 적당히! 절대 배합이 중요하단 사실! 

[완전궁금 Q.7]: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는 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렇게 신전처럼 태웠다가는! 응? 집안살림 몽땅 아작날 것 같은데요? 그렇게 태우라는 말씀인가요?

[이시스홀 A.7]: 아니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해요. 마법사는 평생 향과 함께 사는 사람 아닙니까? 평생에 걸쳐 이런 향, 저런 향, 태우다 결국 대부분 마법사들이 한 가지 향으로 귀결되곤 해요. ‘당연한 귀결-신전 향’이예요. 집에서 나는 냄새말고요. 신전에서 나는, 신전에서 터져나는 향, 그것이예요. 바로 몰약과 유향이죠. 동방박사가 아기예수에게 드린 예물들이죠. 원한다면 황금도 추가할 수 있어요. 숯을 피우고 몰약과 유향을 태우면 그만인 거예요. 그 자체로 끝, 황홀한 인센스, 당연한 귀결의 완성인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꼭 태워보세요. 몰약은 독수리-금성에 상응하며 유향은 사자-수성에 상응합니다. 그러니 태울 수 밖에요. 몰약과 유향, 이게 좋아요. 제일 좋아요.

[완전궁금 Q.8]: 아놔, 그런 걸 어떻게 구해요. 또 어떻게 태울 것이며! 전 스틱향으로 할래요. 샌달우드가 좋아요. 그런데 왜 신전향에 집착하는 거죠? 저도 그렇게 될까, 두렵네요.

[이시스홀 A.8]: 집착이라뇨. 그런 섭한 말씀을! 신전 향이란 모든 마법사들의 로망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옛날 수도원 가보셨어요? 그런 곳에서만 나는 특유의 향이예요. 마음이 차분해져요. 교회나 사찰서도 그런 향이 나잖아요. 아늑하고 깊어지는 향! 갑자기 생각이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 수행하고 싶어지는 향! 그게 신전 향이예요. 그런 향, 꼭 찾길 바래요.

[완전궁금 Q.9]: 에이, 몰라요. 저는 그냥 샌달우드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그것만 있으면 일단 기본 수행은 할 수 있다니까! 앗, 향로가 있어야겠네요? 향로도 있어야 하는 거죠? 향로는 특별히 주의할 게 없겠죠? 아아- 예뻐지고 싶은 날, 그런 날 사용할 수 있는 향도 있을까요? 향마법도 있을 거 아니예요.

[이시스홀 A.9]: 그럼요. 있어야죠. 향로. 크게 주의할 건 없어요. 양초의 촛대가 그런 것처럼 아무래도 화재위험이 있으니까, 향로를 쓰는 거겠죠. 몰약이나 유향 같이 레진을 태울 게 아니면 향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향꽂이로 충분해요. 그래야 나중에 청소하기도 편하니까요. 향로디자인이야 취향에 따라 정하면 그만이예요. 여기에 무슨 법칙이 있는 게 아니예요. 다만 향을 태우는 게 더 중요해요. 인센스매직이요? 허어! 그러면 말이 엄청 길어질 텐데요. 예뻐지고 싶은 날이요? 금성향으로 사용하면 되겠죠. 점성학을 알면 금성이 강한 시간에 인센스매직하면 되겠지만! 점성학을 모른다면 꽝이겠죠. 그러면 달의 주기에 따라 결정하세요. 달이 차오르는 기간에! 머스크와 일랑일랑을 같은 분량으로 태우세요. 그 향연기로 샤워하면 되겠어요. 향연기를 손으로 집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넓게 바르는 거예요. 향이 다 탈 때까지. 무한 반복하세요. 주문이야 ‘예뻐져라’가, 적당할 거예요. 얼마나 예뻐질까요? 삼십 분 후 거울로 확인하세요. 눈코입이 제자리를 찾을 거예요. 금방 예뻐지는 마법이예요. 그런데 마법력은 하루를 못 버텨요. 알아두세요.

[완전궁금 Q.10]: 와! 그런 방법이! 전 스틱향이 마음에 들어요. 향꽂이도 바로 준비해야겠어요. 그런데 참 쓰임새가 많은 것 같아요. 인센스마법의 상응법칙? 그런 게 있을까요? 가령 원소라든가! 이럴 때, 저럴 때 사용하는 향이라든가, 가르쳐 주세요. 최대한 많이 가르쳐 주세요. 절대 두 번 물어보지 않을게요.

[이시스홀 A.10]: 상응법칙이요? 우와! 카발라나 연금술이나 약초학을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기초들이예요. 게다가 계속 저만 떠들잖아요. 아주 조금만, 정말 조금만 얘기해 드릴게요. 상응표는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특별한 표 없이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7행성’으로 하는 게 편할 것 같아요. 인센스 7행성 상응은 다음과 같아요. 샌달우드는 규칙적 토성에, 올리브는 자비로운 목성에, 시나몬은 칼 같은 화성에, 샤프란은 믿음직한 태양에, 바닐라는 세련된 금성에, 타임은 박학다식 수성에, 라벤더는 몽환적 달에 상응 배속됩니다. 간단하죠? 그밖에도 정말 많아요. 사고제어-사고단련-사고통제와 같은 수행 시 효과를 볼 수 있는 인센스는 아무래도 공기원소가 강한 향이 좋아요. 명상 훈련은 공기원소와 물원소가 가득 들어있는 인센스면 더욱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뭐가 있을까, 시트러스 계열의 인센스가 좋아요. 아! 레몬글라스가 좋겠어요. 연금술을 공부하면 약초도 쉽게 응용할 수 있어요. 재료 속 세 가지 성분(황, 염, 수은)을 금방 구별할 수 있어요. 가령 태양에 상응하는 로즈마리는 어때요? 로즈마리 잎은 아스트랄 시각에, 로즈마리 뿌리는 아스트랄 촉각에, 로즈마리 꽃은 아스트랄 청각에 좋아요. 금방 구분되죠? 이처럼 마법은 재료를 알뜰하게 사용하는 법도 제시해요.

[완전궁금 Q.11]: 와! 되게 많네요. 그래도 저는 초심자예요. 마법초심자는 어떤 향을 써야 할까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향이 있을까요?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것부터 사용하려고요.

[이시스홀 A.11]: 특별한 마법이 아니라면! 샌달우드 인센스와 로즈 인센스와 쟈스민 인센스를 사수하세요. 샌달우드는 토성에, 로즈는 태양에, 쟈스민은 달에 상응하거든요. 세 가지 모두 한꺼번에 태우면 생명나무 중앙기둥을 그대로 묘사할 수 있겠어요. 미들필라 수행 시 이렇게 태우면 좋겠습니다. 추방의식 시 도움이 되는 향은 아무래도 시나몬 향이예요. 화성에 상응하거든요. 퇴거하고 정화하는 데 효과 만점입니다. 덤으로 시나몬 향은 벌레들도 무서워 하잖아요. 한편 마법도구도 정화할 수 있어요. 지팡이와 단검은 로즈 인센스로, 컵과 원반은 라벤더로 정화해요. 기타 점술도구는 자스민 인센스로 정화하면 되고요. 로브는 샌달우드로 정화해요. 아이고 힘드네요. 더 많은 질문은 아래 덧글을 이용 바랍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마법생활백서 : 펜듈럼, 다우징편

[Q.1]: 내 손에 쏘옥! 귀엽고 깜찍한 펜듈럼! 선배들이 묵직하게 사용하라던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A.1]: 묵직하게 사용하라는 말이면! 글쎄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죠. 첫 번째 의미는 “펜듈럼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뜻이겠죠? 분신사바와 같은 귀신놀음으로 사용하는 분들이 종종 계시니까요. 귀신놀음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주의를 준거라 생각해요. 두 번째 의미는, 아무래도 펜듈럼은 진자운동이 필요한 추니까요. 크고 묵직하게! 추가 무거울수록 좋은 것이라 생각해요. 무게란 무거울수록 관성이 커지기 때문에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잖아요. 펜듈럼-다우징은 추의 변화, 즉 진자운동을 관찰 및 판별하는 학문이예요. 다우징, 변화를 관찰하는 학문인데 무게 중심을 따지는 것은 정말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뜻에서, 추의 작은 움직임에 놀아나지 말자는 뜻에서, 선배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한편 너무 추가 무거우면 곤란해요. 무게를 가늠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른데 본인 키와 몸무게 안에서 적당한 무게를 골라야 해요. 잘 모르겠으면 약간 묵직한 느낌이 드는 펜듈럼 추가 안성맞춤입니다. 디자인은 무게 다음이예요. 

[Q.2]: 펜듈럼 디자인이요? 뭐가 좋을까요? 저는 금도 좋고 보석도 좋아요. 추천하는 디자인이 있나요?

[A.2]: 글쎄요. 금이며 은이며 동이며 펜듈럼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요. 젬스톤 펜듈럼도 있고 우드 펜듈럼도 있고 동물뼈도 만들 펜듈럼도 있어요. 모양도 다양하고요. 디자인이라면 취향대로 골라야 해요. 본인 마음에 쏙 들어야 좋은 펜듈럼이거든요. 저같은 경우에는 이런저런 펜듈럼을 10년 넘게 사용했는데요. 역시 다우징은 묵직한 재료가 좋았어요. 금이나 은이나 동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고장도 없고요. 대부분 펜듈럼은 휴대하잖아요. 꼭 허벅다리 주머니에 넣고 말이예요. 호주머니에 넣고 공원벤치에 잘못해서 앉으면 그대로 박살난 펜듈럼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펜듈럼은 제법 튼튼한 게 좋아요. 아님 살을 빼던가요.

[Q.3]: 그런데요. 펜듈럼 다우징이 뭔가요? 질문을 하면 곧바로 추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거참 신비한 일이예요.

[A.3]: 무슨 대답을 원하는 지 알겠지만! 그렇게 말씀 드리면 결국 분신사바 같은 귀신놀음으로 오해하실 것 같아 신비롭게 말씀 드릴 순 없고요. ‘힘-에너지’라고 할게요. 우리가 사는 세계도 신들이 사는 세계도 똑 같은 형식의 크고 작은 파동이 존재해요. 어떤 파동은 가로로 크고 세로로 작고 어떤 파동은 가로로 작고 세로로 커요. 복잡하니까, 전기(+)와 자기(-)라고 할게요. 아무튼 이러한 에너지는 우리 삶 안팎으로 가득해요. 생각하는 사람도 그런 식의 파동 안에 살며 그런 식의 파동의 영향을 받아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해요. 그러니까 우리도 생명인 것이죠. 모든 생명체는 이런 식의 전기와 자기로 구성되어 있어요. 에테르, 쉽게 말해 氣라고 하잖아요. 그래요. 펜듈럼은 파동으로 흐름을 그대로 그려 묘사하는 재주가 있어요. 그래서 힘의 맥박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도구라고 해요. 마법사는 펜듈럼을 이용해 힘의 맥박을 짚어 파동의 종과 무게를 계산해요. 그런 작업은 사람을 치료하기도 하고 명당을 찾기도 하고 난관봉착 시 좋은 해결책이 되곤 합니다. 잃어버린 물건 찾기는 물론 다우징으로 물음에 답을 찾는, 점사도 가능합니다. 부끄럼이 많아 낯을 가리는 앤터티와 소환면담 시 펜듈럼은 정말 훌륭한 매개체가 됩니다. 뭐 다우징이야 옛부터 길흉을 점단하기 위해 뼛조각이나 쇠막대기나 버드나무 등으로 많이들 판별했잖아요. 옛날이야기는 너무나 신비로워 삼가야! 그래야겠죠? 시대가 변했으니 우리는 저런 모양의 펜듈럼을 즐겨 사용하게 된 거겠죠. 사심 없이 공간 가운데 떨리는 파동을 짚어내는 재주, 그게 제일 중요한 다우징 기법인 것 같아요. 펜듈럼 모양을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한편 현대마법사는 다우징기법을 사이킥감각계발용으로 많이 사용해요. 아무래도 기감체크 시 다우징만한 게 없으니까요. 자주 사용할수록 감각은 예민+예민해지니까요. 그러나 무리하게 다우징해서 터져버린 아스트랄 감각은 저도 모릅니다. 뒷감당은 각자 알아서! 우리는 성인입니다.

[Q.4]: 그러면 펜듈럼 다우징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요? 책으로 아무리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없어요.

[A.4]: 그 많은 걸. 어떻게 제가 다 가르쳐 드리겠습니까.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펜듈럼 끈은 얌전히 잡아야 해요. 엄지와 검지로 살포시 잡는 게 포인트입니다. 펜듈럼 잡은 손 말고 팔은 옆구리에 딱 붙이고요. 그래야 추가 미친 춤을 추지 않죠. 그리고 질문해요. 신앙하는 마법 신이 계시면 신께!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우주 섭리께!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자연에게! 그것도 이상하게 나의 수호자께!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 고위자아에게! 나의 고위자아에게 묻는 거예요. 질문을 해야 다우징이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의 비상금을 어디있나? 안방 장롱인가? 보일러실인가?”, 예스(yes)-노(no) 다우징방식을 정해야죠. 흔히 추가 시계 방향으로 돌면 예스(네), 반시계방향으로 돌면 노(아니오)입니다. 비상금을 찾는 방식은 물건을 찾는 다우징이니까, 해당 장소에 가서 직접 펜듈럼을 잡아야겠죠. 그것이 여유롭지 않을 때면 ‘예스-노 차트’를 만들어 즉각 다우징할 수 있겠습니다. 다우징 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자의 움직임입니다. 추가 단순운동을 넘어서는 순간의 느낌, 마치 고기가 미끼는 문 순간의 손맛, 경험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있을 때 우리는 진짜를 진짜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일부’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마법생활백서 : 수정구, 스크라잉편

마법생활백서: 수정구, 스크라잉편

A. 맑고 투명한 수정구. 어디, 어디, 쓸까요?


■ 원격 투시, 전생-현생-후생 보기, 병자 치료, 사이킥능력 강화, 멘탈-아스트랄 파스워킹, 정령-요정 세계 입구, 마법사 영혼육 감각 훈련, 에너지볼트-충전, 생명에너지 저장, 마법사 메신져, 신과 교통, 엔터티 소환, 아캬사-점 보기, 공간 충전 및 공간 방어, 리추얼 및 마법능력 보조도구, 자연합일-명상도구 등.


B. 맑고 투명한 수정구. 어찌, 어찌, 쓸까요?

1) 눈알, 힘 빼기!


시선은 수정구에 두세요. 가만히, 이완하세요.

처음부터 수정구와 눈알을 기대하지 말아요! 가만히 먼산을 보세요.

※ 작업 前 전깃불을 꺼야 해요. 양초는 사용하지 말아요. 수정구 정화세척 잊지 말아요.

※ 먼산, 그러나 수정구를 응시하셔야 합니다.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세요.

2) 멋부리지 말고, 이완하세요!

수정구 가운데 마음의 먼산을 유지하세요.

목과 어깨에 힘을 빼고 완전히 이완-트랜스를 유지하세요.

눈은 수정구 저 멀리, 저 세계 끝까지, 아캬사 벽까지 달려갈 거예요.

※ 집중이 어려운 분은 향을 사용하세요. ‘샌달우드’나 ‘자스민’을 추천합니다.

※ 좀 더 강력한 투시를 원하는 분께는 ‘시나몬 향’과 ‘머스크 향’을 추천합니다.

3) 미친 소리 말고, 집중하세요!

수정구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빛-입자가 보입니다.

스크라잉-초심자라면 ‘고요히’ 관찰할 일입니다. 여기 빛-입자는 일종의 ‘통과의례’입니다.

눈알이 아파도 버터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써 해석하지 마십시오.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호들갑 떨며 정령이다, 인류의 종말이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 위 단계서 뜨라따까 유사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 눈알-촛점을 수정구 한 점에 두고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이 기상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4) 보이세요? 놀라지 말아요.

수정구 가운데 빛-입자가 들숨과 날숨으로 꽃처럼 피어나고

오색 연기와 뭉게구름이 눈앞을 가득 채우며 넘실대도! 절대 놀라지 말아요!   

※ 놀라서 집중이 깨지면 스크라잉 작업 역시 깨집니다. 열과 성을 다해 집중하세요.

※ 여기 빛-입자와 뭉게구름이 ‘한 점-한 형상’이 될 때까지, 인내하셔야 합니다. 기다리세요.

5) 들리세요? 들숨-트랜스를 유지하세요.

물러섬, 의식이 완전히 뒤로 밀려나면! 바로 스크라잉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의 목적을 기억하세요. ‘占’입니까? 아니면 ‘사이킥비전’입니까?

마음 깊이 최고의 섭리-신과 수호자에게 도움을 재차 청하고 스크라잉을 즐기면 됩니다.

※ 멘탈-아스트랄 프로젝션의 경우 ‘거쳐왔던 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 프로젝션 후 집으로 돌아갈 길이 헛갈리는 경우, 매트릭스와 은선을 기억하고 집중하세요.

※ 아카샤기록 및 영존재의 도움을 받은 경우, 반드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매너입니다.

6) 스크라잉-자신감은 오직 훈련 뿐입니다.

수정구-스크라잉은 오감을 만족하는, 사이킥-직관의 도구입니다.

특히 스크라잉을 하며 점-상담을 하는 분은 멀티-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사례자의 숨가쁜 질문공세가 여러분의 집중력을 공격할 겁니다.

집중이 깨짐과 동시에 점-사이킥은 혼선될 것입니다.

정말 큰일이겠죠? 그러니까, 의식의 멀티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 멀티-훈련의 비결은 바로 ‘사고통제’입니다.

※ ‘사고통제’는 <헤르메스학 입문>을 참고하세요. 

7) 수정구 관리, 어렵지 않아요.

수정구 세척은 흐르는 물이 제일입니다.

흐르는 물은 바닷물도 좋고 임진강물도 좋습니다. 그러나 ‘수돗물’이 제일입니다.   

리추얼 및 병자 치료 작업 후 수정구는 꼼꼼히 ‘세척-정화’해야 합니다. 세제를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정화 방법은 각자 따르는 마법체계를 따르는 것이 제일입니다. 섭리는 그렇게 작동합니다. 

※ 공간 정화용 및 충전용 수정구가 아닌 이상 수정구는 비입문자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습니다.

※ 비입문자가 수정구와 접촉했는 경우, 성내지 말고  세척 및 정화하면 될 것입니다.

※ 수정구 보관 시 실크-천을 사용하세요. 실크는 사이킥 절연효과에 그만입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연금술: 어버이 이름들

어버이 이름들(1)

알케미/알케미아/알쉬미/알씨미, 연금술이 말하는 어버이 이름들. 들어봤는가? 태양과 달, 장미와 백합, 낮과 밤, 사자와 독수리, 붉은 것과 푸른 것,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과 사라, 왕과 여왕, 창과 방패 … 등. 바로 저 이름들이! 저 개념들이! 그 시절, 르네쌍스 알쉬미스트들의 여린 눈알을 파먹은 것이다. “꽥꽥” 같은 날, 같은 시간, 저 어버이 이름을 쪼아댄 밀라노 연금술 입문자들의 비명이다. 학생들의 배창시를 보라. 흑사와 백사의 뒤틀림. 그러니까, 창자와 한데 꼬인 것이다. 짜릿하겠지. 혈액순환장애다. 

어버이 이름들(2)

어버이 이름들. 마치 수쉼나나디 가운데 이다와 삥갈라 개념의 나열 같은, 그 이원론적 표상들. 지독하다. 그렇게 연금술은 눈 먼 자들의 기대, ‘금’에 대한 욕망을 단번에 박살낸 것이다. 그러나 ‘참-빛’, ‘참-진보’를 열망하는 그대. 포기 마라. 연금술의 빛은 우리와 몹시 가까운 것이다. 그래, 찾기 쉽다. 거기 있다. 다만, 낮밤을 가르는 상징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상징언어-사용능력은 우리 오컬트학문의 필수조건이다. 어버이 이름들? 왕의 기예, 마기의 지혜, 연금술의 통과의례겠다.  

어버이 이름들(3)

결국 어버이 이름은, 각 계에 드러난 존재양태 및 변성상태를 말한다. 어제 ‘아버지-태양/어머니-달’이, 내일 ‘아버지-달/어머니-태양’이 된다. 한 달 후 ‘노인-태양/꼬마-달’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두 ‘하나’다. 이러한 개념들, 연금술 작업을 모르는 인식들의 평가는 난센스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반영된 보편진리다. 궁금하면 좌우로 핥아 보면 될 일. 처음에는 많이 헛갈리겠다. 그래도 힘을 내라. 용맹정진하여 금을 완성하자. 연금술, 그 어원부터 불확실한, 그러나 그 위력은 너무나 명확한 학문 아래 영혼육을 연마하는 우리, 멋쟁이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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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타로, 카드일까?




타로, 과연 카드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 주님께 물어도 “아니라” 하실 걸? 그렇다면 알록달록 그림 가득한 저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간단하다. 타로, 타로라 발음하면 된다! 물론 지금도 카드공장서 수두룩 닥상으로 쏟아지겠다. 그러나 그것은 카드가 아니다. 분명하다. 타로는,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작고 두꺼운 종이나 플라스틱 따위가 아니다. 단순 안부나 축하나 연락 목적 같은 기타 소개장도 아니며, 그날의 내용을 정리한 표/다이어그램-카드도, 의료보험카드도, 공중전화카드도 아니다. 그래, 진짜 신경질 나는 대목, 게임도박/트럼프 카드도 아니란 말이다. 왜? 매일 아침 오광 뜨는 화투도 타로라고 하지!  


타로, 대체 무엇인가?


타로,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저 <경전>들의 ‘한 소리’, 그 위대한 선생들께서 기록하신 ‘법칙들’, 들어 본 적 있나? 쉽게 말해 타로는, 보편진리, 즉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꽉꽉 눌러 담은 그릇이라고! 갑자기 머릿속이 번뜩이는가? 믿고 따르라. 그 빛을 의지하라. 그게 ‘참-로고스’다. 그런데 내가 ‘타로=그릇’이라고 했다. 그릇은 ‘음(-) 여성형’이다. 음(-) 여성형은, 우리 세계를 가득 메운 그 힘의 ‘수동성’을 말한다.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고? 전통오컬트상징체계, 그 언어를 풀어본 것이다.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 흔히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하지 않는가. 주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그래서 인간을 ‘작은 이’, ‘소우주’라고 부른다. 신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4극자석 인간은, 작지만 강하다. 역사가 증명한다. 주께서 아담 코에 루아흐를, 그 생기를 꽉꽉 눌어 담았다. 저 타로=그릇처럼! 그 시절, 창조 과정 가운데 인간-존재는 음(-)이었다. 제 호흡을 하며 인생을 시작한 인간-존재는 양(+), 그러니까 이름과 형상을 입은 인간은 죽어가는 것이다. 진화는, 보편법칙에 따라 알아서, 재주껏 할 일이다! 


그러니까, 타로가 뭐냐고?


아까 말했잖아?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꽉꽉 눌러 담은 그릇이라고! 우리 혀로 담을 수 없는, 테트라그람마톤(JHWH)의 비의라고! 번뜩이지 않어? 보편진리 가운데 가장 ‘참된 것’을 기록한 ‘책’이라고! 그래, 책! ‘로고스-서판’이라고. 그게 타로라고! 그게 22권이든, 32권이든, 56권이든, 78권이든 말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타로는! 로고스-참지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재현한 호흡이라고! 이때 호흡은 쉬바의 것과 같겠지. 그러나 우리가 타로를 보는 ‘순간’, 읽는 ‘순간’ 그 타로 호흡은 양(+)이 된다. 또한 우리와 함께한 타로 호흡, 타로의 상징은, 저 인식 넘어 가장 불가해한 것으로, 우리의 뇌리에 콱 박히겠지. 그리고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 ‘읽지 못한 것’은, 우리 잠재의식 안에서 썩어갈 것이야. 곧 죽겠지. 해석받지 못한 상징-진동은 물질-시공간의 범주를 벗어나므로.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갤러리 마법노트’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개인의 운명에서 집단 까르마의 비중은?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다를 보지 못했다.”
영화 <관상>에서 회한에 사무친 관상쟁이가 한 말입니다. 여기서 파도는 한 개인의 까르마요 운명이며, 바다는 시대정신이며 역사이며 집단 까르마입니다. 파도에 골몰하는 것은, 운명을 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지요. 이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까르마와 운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까르마는 원인과 결과라는 아주 단순한 우주보편법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나’ 라는 개인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마찬가지죠. 따라서 한 존재에게 적용되는 까르마는 존재의 여러 층위에 걸쳐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운명입니다.

C.G.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식-무의식의 2개 층 이외에도, 이 둘에 얽혀 있는, 주체의 여러 가지 측면을 논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본능, 충동, 욕망, 이성, 의지, 기억, 정신양, 그리고 원형 등등.
까발라 학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이 문제를 논했습니다. 까발라에서 탐구하는 주체의 열가지 측면은, ‘위대한 정신’과 수동적인 통찰(선천적 잠재력)과 능동적인 의지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원형’의 영역입니다. 원형은 누미노제, 즉 신의 영역입니다. 이미 원형의 영역으로부터 의지와 통찰이라는 양과 음의 영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림1> 의식의 측면들

우리의 까르마에는 겹겹의 베일이 존재합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주체 의식의 여러 측면들은 겹겹의 베일을 포함하는 깊이를 갖습니다. 복잡하지요? 결국, ‘나’ 라는 개별자는 이렇게 수평 수직으로 쪼개어 보면 몇 가지 에너지 덩어리들이 얽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몇 개의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점성학 천궁도에 표시되는 7행성입니다. 주체의 일곱 측면! 나머지 셋은 위대한 영, 세계혼, 전체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 덩어리들은 수직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드러나는 것과 잠겨있는 것, 즉 다시 양과 음의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중 가장 밑바닥은 원형과 맞닿아 있습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그 어떤 개별자의 경우를 막론하고, 선천적이며 집단적입니다. 집단의 경험이 기록된 창고 섹션인 셈입니다. 이 섹션들은 서로 얽혀 힘을 주고 받으며, 한 개별자의 여러 가지 본성과 충동을 결정합니다.

수직 스펙트럼의 상층부로 갈수록 개별적이고 후천적이며 표피적인 경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한 개체의 표면 상으로는 이 영역이 전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표면이야말로, 흙으로서 자기보존본능을 갖는, 영적 자아가 경험을 계속하게 만드는 윤회의 근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때문에 영적 자아 개체들은 윤회를 거듭해야만 합니까? 경험의 기록-흔적들은 끊임없이 축적되어만 가는데, 그 끝은 어디입니까? 왜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 회귀, 해탈을 삶의 목표로 삼을 만큼, 이 반복을 괴로워 하겠습니까?
하나, 즉 신으로부터 나뉘어진 개체는 확장-진화하는 신의 부분입니다. 우리 세계 전체는 확장-진화만 합니다. 부분은 퇴보와 진보, 확장과 수축을 거듭하지만, 전체는 확장만 합니다. 마치 파도와 바다 전체처럼 말입니다. 모든 개체, 즉 부분이 운동하며 확장-수축하며 진화-퇴보하며 경험한 흔적은, 전체가 확장-진화하는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요가 수뜨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여지는 대상(현상세계)은 오로지 보는 자(신) 자신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목적을 위해 모든 개체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인 주인공이 그것을 보고 그로 인해 해탈에 이르고자” 스스로를 나누고 고정화하여 개체를 창조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 글의 목적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자 이제, 이른바 집단 까르마와 개별 까르마가 한 개체에게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명사 ‘새’는, 그 나름의 본성과 충동의 공통점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새가 실체입니까? 아닙니다. 개념입니다. 그러나 개념적 실체입니다. 까치와 까마귀, 독수리와 참새는 어떻습니까? 개념에서 실체로, 추상에서 구체로 조금 더 나아간 개념 집단입니다. 
추상적일수록, 개념적 집단일수록, 그것은 영적 자아와 가깝습니다. 선천적이며 집단적인, 한 개체의 본성과 충동을 좌우하는 전체입니다.
제 아무리 잘 난 새도, 새라는 개념적 실체 범주에 있다면, 날개와 이러저러한 본성과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새라는 집단의 축적된 경험이 한 마리의 새의 본성을 좌우합니다. 까치 까마귀 독수리 참새라는 개념적 집단에 이르면 본성과 습성은 더 구체화됩니다. 참새라도 조금 더 구체적인 종으로 나뉘어집니다. 환경에 적응하며 습득한 종의 습성은 유전됩니다. 모든 경험의 기록-흔적이 대를 거듭하며 그대로 적용되니까요. 주체의 층위 중에서 그 모든 경험-흔적을 기록하는 주체의 층취를 영적 자아, 멘탈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조금 더 복잡할 뿐,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화가 진행된 집단, 그 마지막 고리인 인간에게는 ‘의지’와 ‘심상화’ 라는 영역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내 운명의 표면은 그 모든 것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그 표면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품은 흙이며 윤회의 근거입니다. 나의 개별 까르마는, 내가 속한 개념적 실체로부터 구체적 개별자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 까르마를 표출하는 표면입니다.

그런데 집단과 개체는 별도의 실체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이데거까지 간파했던, 바로 그 ‘전체와 부분’의 관계입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정언을 기억하시죠? 부분인 개별 까르마의 거대한 밑바닥엔 집단 까르마가 잠겨 있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편 추상적 실체인 한 집단의 집단 까르마는, 부분들 즉 속해 있는 개체의 경험을 통해 운동합니다. 경험들의 양이 쌓이면 양질전환을 통해 변성합니다. 즉 진화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진화 단계이며, 역사의 시대정신이고, 신의 측면입니다.

개별 까르마는 집단 까르마와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는 집단 까르마가 존재 방식에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 세계는 집단에서 개체로의 진화 일로에 있습니다만, 특히 인간이라는 개념적 집단에게서는 더욱 더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만, 그렇다고 거대한 집단 까르마보다 개별 까르마의 영향력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같은 시공간을 점한 동시대의 개체들은, 속해 있는 집단의 집단 까르마에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점을 볼 때 파도에 골몰하는 경우, 특히 표면의 정지된 형상에 집중하는 경우, 진짜 운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수직과 수평으로 짜여진 겹겹의 스펙트럼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화의 향방과 시대정신, 역사의 흐름은 물론이며, 개체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집단의 까르마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본성과 충동의 퀄리티, 즉 내용이 좌우되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동일한 천궁도를 가졌다 해도, 전쟁 상태의 시공간에 태어난 사람과 평화 상태에서 사는 사람의 퀄리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힐렉의 상태가 같다 해도 수명의 결정력은 집단 까르마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같은 상태의 천궁도라 해도, 일본인의 운명과 한국인의 운명은 색깔이 다릅니다. 충동의 색깔, 자극-반응의 메카니즘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추상적 실체, 시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특수’의 모순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성학은 단순한 공식으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닙니다.
겹겹의 베일을 가진 인간, 자연, 신, 세계의 본성과 운동 방식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학문입니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LBRP: the Archangels

공기원소원리 대천사: 라파엘(RAPHAEL), 즉 신의 치유자
티페레트(Tiphareth): 태양(디오뉘소스의 비의)과 십자가 가운데 카두케우스(caduceus)

우리에게 태양은 진정으로 ‘생명을 주는자'(Giver of Life)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아버지 하느님이야말로 ‘태양 뒤의 태양'(Sun behind Sun)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사실 티페레트는 케테르의 직접적 반영물 아니던가. 생명이 이 땅에 오는 것은 태양의 중재를 통해서다. 우리는 ‘티페레트 의식’의 힘을 빌어 생명력의 근원에 닿을 수 있으며,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힘을 끌어올릴 수 있다. …(중략)티페레트는 소우주와 대우주를 매개한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곧 태양 영역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태양 뒤의 태양’은 현현을 위해 하나로 집중된다. …(중략) 이 영역에 해당되는 신의 이름은 엘로아 베다트(ELOAH VA DAATH)이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곧바로 ‘감취진 세피라’인 티페레트와 케테르 사이에 있는 다트를 연상하게 된다. …(중략) 따라서 ‘테트라그람마톤 엘로아 베다트’라는 문구를 ‘정신의 영역에 현현하는 신’이라 번역해도 될 것이다. …(중략) 티페레트의 대천사는 라파엘, 즉 ‘태양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영’이다. …(중략) 

<미스티컬 카발라> 289, 299, 301쪽 발췌

물원소원리 대천사: 가브리엘(GABRIEL), 즉 강한 남자, 신의 영웅
예소드(YOSOD): 달(셀레네, 루나, 헤카테, 이시스, 하토르)과 향수 가운데 성배(Saint Graal), 크리스탈 컵

예소드의 상징체계를 공부하다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상징 한 벌이 나타난다. 우선 한 가지 상징은 강함(strength)을 통해 확립된 우주의 기초’라는 개념이다. ‘강함’이라는 개념은 ‘아름답고 매우 강한 벌거벗은 남자’라는 마법적 이미지 안에서 다시 등장한다. 또한 샤다이라는 신의 이름(*SHADDAI EL CHAI), 즉 전능함과, 케루빔이라는 강한 천사들, ‘위대한 힘’이라는 비의적 이름을 가진 완드 9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상징은 달이다. 물원소의 대천사 가브리엘의 주재 하에 매우 유동적으로 조수 간만 상태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중략) 카발라 학자들의 가르침대로, 예소드는 다른 모든 세피라의 방출물을 담는 저장소라고 이해해야 한다. 또한 이 방출물을 말쿠트, 즉 물질계로 전달하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전달장치이기도 하다. 세페르 예찌라에 따르면, 이 방출물을 정화하고 검증하며 바로잡는 것이 바로 예소드의 기능이다. 따라서 조밀한 물질의 영역을 바로 잡기 위해 또는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곳 예소드에서 모든 설계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소드는 물질계에 효력을 미치기 위해 고안되는 모든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중략) 

<미스티컬 카발라> 364, 365쪽 발췌

불원소원리 대천사: 미하엘(MICHAEL), 즉 신과 같은 자
호드(Hod): 수성(헤르메스, 토트)과 이름 가운데 화염검(flaming sword)

* 이름, 즉 능력의 단어에 대해서는 <미스티컬 카발라> 301쪽(70, 71, 72), 359쪽(39)를 참조하라.

호드에 속한 신의 이름은 만군의 신 ‘엘로힘 쩨바오트(ELOHIM TZEVA’OTH)’다. 이 이름은 매우 재미있는 방식으로 자웅동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남성형 복수를 가진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카발라 학자들의 방식에 따르면 이중적 형태의 활동, 즉 유기체를 통해 기능하는 힘을 가르친다. …(중략) 쩨바오트는 군단 또는 군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에 의해 생기를 얻는 군단의 형상을 떠올리면서 호드 안에 현현하는 신성한 생명을 개념화할 수 있다. 강력한 대천사 미하엘은 호드에 배속된다. 우리는 다시 여기서 생각의 자양분을 얻는다. 그는 언제나 뱀의 머리를 짓밟은 채 검으로 뱀을 조각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균형의 상징인 저울을 들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것이 세페르 예찌라가 말하는 ‘근원자의 수단’과 동일한 개념이다. …(중략) 

– <미스티컬 카발라> 357쪽 발췌

흙원소원리 대천사: 오리엘/우리엘(AURIEL/URIEL), 즉 선한 청지기
세피로트(Sephiroth): 생명나무와 클리포트 가운데 원반(pentacle)

* 오리엘 소환 작업 中

움브라: 속히 내 부름에 응답하라! …(중략)

오리엘: 에덴의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딸들과 함께 세계의 균형을 고뇌하리. 어머니(Binah)께서 주신 권능으로 모든 이름과 형상 있는 것들의 종말을 예고하리라. …(중략)

움브라: 대체 누구냐?

오리엘: 나는 통합이며, 미쁘신 여왕의 번견이요. 4원소영역의 무덤이며, 세피로트(Sephiroth) 변방의 짐승이라. …(중략)

움브라: 그대 위계에 따른 업무는 무엇인가?

오리엘: 세계의 양(+)과 음(-)이 고이는 곳에서, ‘왕 되신 나의 주’의 섭리에 따라 산달폰(말쿠트, 어둠의 대천사)과 메타트론(케테르, 빛의 대천사)을 가르고, 이들의 팔다리를 제단에 바쳐 생명나무 밑거름 삼는 것이라. 원죄의 과실(過失)이 그러하니 세계의 과실(果實) 또한 그러하다. 법칙에 따라 카르마의 빚은 여기서 보상되며, 모든 에테르는 여기서 환원되리라. …(중략)

** 어린 입문자를 향한 오리엘의 경고
오리엘: 말쿠트(Malkhuth) 정의의 관문과 눈물의 관문, 그 문턱에 선 자들은 듣고 좌절하라. 32경로의 출입은 굽이치고 가파르다. 완벽 그 자체, 지고의 문턱을 열망하는가. 어떤 경로의 출입을 선호하는가. 그 경로가 무엇이든 험하기는 몇 갑절이라. 혹, 화살 경로를 찾는 형제여. 아서라! 중앙기둥을 타고 올라 심연을 거치기 전, 네 영혼이 상할 것임은 물론이요. 각 존재와 힘이 너를 영영 멸시할까 염려됨이라. …(중략)

<움브라 마법일지> 발췌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박영호(움브라) 선생님 글.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Quabalistic Cross



* Q.C.의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다.

1. 우리는 두뇌의식과 심상화와 의지력의 힘을 빌어 질료를 변성시킬 수 있다, ‘호흡’이 추가된 변성 작업은 더욱 효과적이다. 첫 호흡(RUACH) 안에는 창조, 유지, 파괴의 흐름이 내재한다. 4극자석은 ‘들숨’, ‘날숨’, ‘멈춤’의 비의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4극자석의 영향력 아래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법칙을 지배한 마법사에게 있다. 

2. 우주보편법칙에 따라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4극자석-인간존재는, ‘신의 형상’을 입을 수 있다. 형상의 에너지를 취해 테트라그람마톤(YHVH),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QC는 소우주가 소우주 안에서, 소우주가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신의 이데아와 진화의 국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 우리는 차원 상승(Sephiroth)을 통해 절대 힘(우주적 신)을 그릇(자신) 안에 가득 채울 수 있다. 소우주 지배는 입문의 첫 단계다. 우리의 의식이 일상성을 박차며 쏜살같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 합일! 우리 존재 안에서 각 힘의 위치와 흐름과 순환의 이치를 깨닫는 것, 합일! 우리의 우식을 우주 끝까지 끌어올려 2000년 전의 태양을 삼키는 것, 합일! 지고의 법칙을 열망하고 이해하고 또 지배하는 것, 합일! 각 차원에 걸쳐 있는 자신의 3중체를 인식할 때, 우주의식의 첫 숨이 멈춤에 이를 때, 지고의 빛이 자기-전존재를 감싸게 될 것이다. 이 ‘빛’이야말로 아담카드몬(Adam Kadmon)의 오장육부요 피톨이다. 


3. 들숨과 날숨을 통해 멘탈-아스트랄 매트릭스의 긴장 상태(횡경막/에테르)를 유지하라. 긴장 상태의 우주-호흡은 에테르질료를 자극하며, 적합한 심상화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한다. 따라서 우주-4원소작용을 이해한 마법사는, 우주-에테르질료를 변성시켜 완전한 아담카드몬의 형상을 취할 수 있다. 


4. 아담카드몬으로서 첫 호흡을 시작한 마법사는, 손을 뻗어 ‘절대 힘’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카샤 혹은 아인 소프, 절대 음(-)이다. 그 상태로서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순수한 ‘없음’은 루아흐 엘로힘(RUACH ELOHIM), 우주-불원소원리(Shin: 300/Resht: 창조)다. 우리는 아타(ATAH)를 통해 세계의 첫 숨, 첫 의지를 아담카드몬 안에서 재현할 수 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바뀜은 아도나이 멜렉흐(ADONAI MELEKH), 우주-흙원소원리다. 말쿠트(MALKHUTH)를 통해 세계의 완성을 보라. “위에서와 같이 아래서도 그러하다.” 이제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 맞물린 하나의 세계다. 베게부라(V’G’BURAH)와 베게둘라(V’G’DULAH)를 통해 우주-남성원리(+)와 우주-여성원리(-)가 완성된다. 자연법칙과 운동이 마법사의 확장된 의식 아래 있다. 우리는 레올람, 아멘(L’OLAM, AMEN)을 통해 우주적 균형에 이를 수 있다. 서로 맞물린 세계에서, 영혼의 중심에서, 가장 적합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입문의 길을 따라 진보한 영은, 세계와 존재의 심도점(solar plexus)에서 신(힘)과 만날 것이다. 이것은 신의 이데아와 교통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중심(中心)이 중심 안에서, 중심을 통하지 않는, 그런 소환이나 기도는 없다. 아무튼, 결국 자신을 테트라그람마톤으로 채운 아담카드몬은 포화 상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균형’, ‘신과의 합일’인 것이다. 이제 마법사는 신의 권위를 입은 ‘완벽한 인간’이며, ‘전우주의 신’이며, ‘완벽 그 자체’다. 완성된 Q.C.는 완전함에 다다른 ‘최고 신성’을 표상한다. 모든 힘과 존재는 이 권위에 절대 복종할 것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박영호(움브라) 선생님 글.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본 칼럼은 네이버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연재된 칼럼으로써, 오컬트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게시된 글을 퍼갈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셔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또는 수정 및 가감하여 강의 및 저작에 이용하는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럼] 오컬트 유추

M. 엘리아데는 저서 <신화 꿈 신비>에서 여러 문명권에 널리 퍼져 있는 ‘세상의 나무’ (생명나무)라는 상징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징이 갖는 힘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나무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인간의 의식에 엄습하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총체적으로 ‘알게’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상징은 “어떤 특별한 대상이 우주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 경험은 영적 행위로 변환되고 더 활성화 된다.” 오컬트 학문에서 상징이 갖는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목이다.

어떻게 <나무> 라는 사물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표상할 수 있는가? 이때 나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라는 사물은 제한된 의미-지시의 틀을 깨고 다시 태어난다. 4극자석인 인간의 정신, 즉 의식-잠재의식이라는 한 쌍의 대립자가 ‘본질>관념>형상’의 창조-진화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유추 작업에 돌입함으로써, 하나의 상징 이미지를 총체성 안에서 재탄생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오컬트 유추 과정 속에서 모든 상징이 궁극적 실재로 환원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형상-충동이라는 이원성이 통합을 통해 어떻게 부분을 전체로 환원시키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탐구의 주요 목표다.

(1)상응의 원리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컬트 유추법이란 인간 안에 발현된 진정한 자연(본성)을 모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4극자석과 상응합니다.”

이 짧은 언명 안에 오컬트 유추의 모든 원리가 담겨 있다. 인간 안에 발현된 신의 본성(진정한 자연), 그리고 그것이 갖는 4극자석으로서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유추 능력을 납득할 수 없다. 따라서 우선 인간의 유추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4극자석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살펴 보겠다.


<헤르메티카>에는 (원형적)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다음, 신의 양극 분할과 그 형태화 양식 즉 7행성의 본질을 나눠 받고 창조자의 반열에 올라선 다음, 하위 자연과 결합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헤르메티카>는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실락, 즉 하위 자연과의 결합을 통해 4극자석이라는 ‘신의 형상’을 완성해 구현해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뉨과 통합을 반복하며 순환의 고리를 확장해 가는 창조 행위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음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 인간 즉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창조자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실락한 인간, 즉 말쿠트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 안에 하나의 ‘기억’으로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 안에 발현된 본성은, 세계를 창조했던 모든 기억, 펼쳐짐의 모든 과정을 응축해 가지고 있으며, 창조-진화의 모든 기억이 영-혼-육의 다양한 시스템 안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각 차원에서 그에 걸맞은 창조 행위를 반복-재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선험적 기억과 창조 행위의 모방을 통해 인간은 ‘기호 작업’을 한다. 언어 체계와 표현-해석-소통 능력은, 그것이 말이든 문자든 기호든 상징 언어든 막론하고 모두, 세계의 창조-진화 패턴을 모방하는 물화(物化) 작업이다. 또한 기호 또는 상징 이미지에 집중해 추상적 실재 즉 본질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은, 창조-진화 패턴의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탈물화(脫物化) 작업이다. 이 두 가지 패턴은 모두 두 번째 로고스에 해당한다. 두 번째 로고스는 신의 말씀(첫 번째 로고스)을 모방하여 재현하는 언어-문자-기호 체계를 말한다. <쎄페르 예찌라>는 바로 이것의 원리를 파헤치는 문헌이며, 카발라는 이 창조 행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진동의 학문이다. 물론, 상징 언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따라서 카발라는 우리가 오컬트 유추법의 구조와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상응법칙은 위의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카발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창조의 국면들을 살펴 보자. 아찔루트계(원형계 : 모든 모티프가 형성되는 국면), 브리야계(창조계 : 양극 분화를 통해 형상의 단초가 기획되는 국면), 예찌라계(형성계 : 충동과 제한의 작용을 통해 다양한 형상이 물화의 틀을 구성하는 국면), 앗시야계(작용계 : 예찌라계에서 만들어진 제한-형상의 틀이 다양하게 결합하여 시공간의 사건으로 구성되는 국면)는 모두 앞선 세계-국면의 모든 과정을 자신 안에 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실락을 통해 완성한 4계의 마지막 존재 국면에는 앞선 모든 국면이 반영된 형태로 재현된다. 물론, 인간 자신은 그 모든 것의 집약물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짜로 마음을 먹으면, 이 모든 국면을 왕래하며 각 국면의 패턴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딱딱한 물질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인간의 다른 차원 즉 혼과 영은 각각이 속해 있는 세계 즉 아스트랄계(앗시야의 예찌라)와 멘탈계(앗시야의 브리야)의 자유로움에 놓여 있다. 이들 혼과 영의 활동은 육체가 물질계의 사건과 맞물려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순간에 시공간의 제한 속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각인된 ‘기억’은 시공간의 제한 속에 드러나는 국면을 잡아채어 그 연결선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상응법칙의 연결선이며, 우리는 각 차원의 상응성을 찾아내는 유추 작업을 통해 그 ‘기억’을 가동시킬 수 있다. 

결국, 오컬트 유추는, 상응법칙에 토대하여 인간의 영-혼-육이 벌이는 또 다른 창조 행위다. 우리는 이 창조 행위의 섬광 같은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재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의 일상 의식은 이 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대부분 무시한다. 유물론적인 현대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의도적인 유추 작업, 즉 모든 국면의 상응관계를 탐구하여 본질에 다가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각 국면의 상응성을 찾아냄으로써 전우주의 총체성에 다가설 수 있다. 우주에 가득한 신의 이름, 그 울림의 멜로디가 상응관계에 따라 수축의 경로를 흐르다가 ‘하나’로 환원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상징과 상응

그렇다면 상응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어떻게 어떤 형태로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층위도 다르고 밀도도 다른, 이것들과 저것들을 연결해 총체성을 획득할 것인가? 다이온 포춘은 <미스티컬 카발라>에서 상징 이미지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카발리스트들은 조금 다른 과정을 택한다. 그들은 정신에 형이상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추상적 실재의 정제된 공기 속으로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다. 대신 눈에 보이는 실재적인 기호에 집중하여 이 상징을 통해 추상적 실재를 표현한다.” (39쪽 06번)

이처럼 우리가 먼저 상징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상징은 자연의 언어입니다. 다양한 영상, 숫자, 색깔, 기호, 소리 등이 상징으로 이용됩니다. … 자연은 바로 이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잠든 동안 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이지요. 카발라 생명나무는 탁월한 상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8쪽)

여기서 자연의 언어란 별빛,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시적 표현이 아니다. 매우 개념적인 카발라 용어로서, 1로부터 방출된 에너지의 진동이 형상화되어 영상(이미지), 색깔, 기호, 소리 등 제한된 스펙트럼으로 구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에너지의 진동이 우리의 일상적 인지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된 상태라는 말이다. 예찌라계 이후의 세계 즉 하위 자연의 세계에서 진동은 이처럼 일정한 형태를 띠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지구영역인 앗시야계에서 모든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발현된 우주의 각 국면들, 즉 각 계를 넘나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높은 진동, 분산되지 않은 고밀도 빛은, 우리의 일반적 상태에서 단계를 건너뛴 채 곧바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이온 포춘이 지적한 대로 “훈련받지 않은 지성(사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다.

따라서 순수 관념과 만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태를 띤 구체적 실재들이 연결되어 단계별 통일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학, 기호학, 심리학, 신화학 등의 오랜 연구 결과 안에 이 과정에 대한 실마리들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물론 헤르메스학과 카발라의 심오한 상징언어는 한꺼번에 그 구조 속으로 들여보내 준다. 각 국면 및 계의 단층에 뻗어 있는 형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첫’으로 환원시키는 충동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단계별로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인문학적 탐구와 오컬트 학문, 이 두 분야는 각각 오컬트 유추 과정의 구조를 구석구석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하게도, 이들 각 학문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며 따라서 시선이 꽂히는 면이 다르다.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우주의 다른 측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훑어가며 이 글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 하위 자연의 언어인 상징을 통해 어떻게 본질(추상적 실재, 관념)로 이동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열쇠다. 우리는 상징의 가치, 상징의 구조, 상징의 해석 및 의미화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지점들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상응성에 토대를 둔 상징이 발휘하는 역동적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징언어와 추상화-의미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체들을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호로서의 상징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로 하자.

(3) 기호의 구조와 상징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과 언어학의 성과들을 통합 정리하여 ‘기호현상’을 ‘기호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는데, 그의 ‘구조’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구조’에 비해 인간 정신의 운동성을 훨씬 잘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기표-기의>의 결합체로 파악한 언어학자들에게 언어는, 규약에 의해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제한된 기호였다. 이에 비해 상징 기호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의성(多意性)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코는 기호란 종류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쨌든 기호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에코는 그의 책 <기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미 과정의 한 요소로서 기호를 분류할 때 기호는 어쨌든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은 기호를 <다른 것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퍼스는 … <어떤 관계나 명목하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관계>는 기호가 그 대상의 전체를 가리키기보다는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저런 관점이나 특정한 실천적 사용의 관점에서 그것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46쪽)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를 위해”란 소통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전제된다. 그러나 범위를 더 넓힐 수도 있다.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한다는 것은, 힘 자체의 운동에 기인한다. 어떤 에너지가 운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후의 단계는 전 단계를 반영한다. 그렇지 않은 운동은 불가능하다. 이때, 전 단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는 한 지점에서 그 앞의 운동을 가리킬 때 “그것을 대신”하여 기호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을 대신하는 재현 방식은 ‘모방’이다. 그런데 대상 전체를 가리킬 수는 없다. 반영하는 지점에서 볼 때 반영의 모체는 전체이며 반영물은 결과이자 부분이므로,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에코가 이러한 개념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기호에 추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는 기호와 정신의 역동적 구조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에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인용한다. “기호는 결과의 명백한 전항(前項)이다. 아니면 이와 반대로, 유사한 결과들이 확인되는 경우, 기호는 전항의 결과이다. 결과가 확인될수록 기호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때 다양한 추상화의 과정, 의미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맥락’의 공유가 필요하다. 에코는 이것이 사회적 규약으로서의 코드 공유에 한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불문하고 코드가 공유되는 맥락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다. 원인-결과의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래밍된 창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것이 단순한 자극-반응이라면 ‘연상’의 형태로, 복잡한 지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추론’ 즉 유추의 형태로 ‘기억’을 끄집어내 창조-모방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기호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때 상징은 모두 기호라 부를 수 있다. 다시 에코의 인용을 재인용해 본다. “볼프(Wolff)는 기호를 <다른 것의 과거 또는 미래의 존재를 추론하게 하는 무엇>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스토아학파를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학자들은 기호를 <정당한 연결로 구성되어 결과를 밝혀낼 수 있는 명제>로 정의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수학에 반대하여>)” 또한 아바냐노Abbagnano의 <철학사전>을 인용하면서, “기호는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은 기호의 가능성은 기호의 구조에 기인한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기호 규정을 정리하기 위해, 기호의 구조에 대한 견해들을 크게 두 가지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해 보겠다. 그림1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처럼 하나의 기호(언어)가 이원적 항 즉 시니피앙(Sinifiant)-시니피에(Sinifié)로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소쉬르처럼 언어가 이 두 항의 결합체라고 파악할 수도 있다. 이 두 항은 형식–내용으로 이해된다. 그림2는 기호의 다의적 지시 구조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이다.

<그림1> / <그림2>


에코가 시니피앙(Sinifiant)과 시니피에(Sinifié)라는 기호 구조를 역동적으로 만든 핵심은, 기표=형식 / 기의=내용 이라는 <지시의 일방성> 도식을 벗어버린 데 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각각의 형태-실체를 갖는다. 이 두 항이 각각 자기 운동을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실재로 바뀐 것이다.

원래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기호는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표현)의 결합체다. 예컨대. <1>이라는 숫자는 시니피앙으로서 수 ‘하나’라는 시니피에를 지시하는 가장 단순한 기호다. 인간은 고도의 추상성, 즉 헤아림이라는 관념을 응축시켜 형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모방 과정을 거쳐 표현(형상)과 의미(힘)의 통합체인 실재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곧 두 번째 로고스로서, <말씀>의 모방-재현 작업의 의미다. 그런데 그림2의 구조에서는, 이때 일단 만들어진 기호의 이원적 항, 즉 기표-형상과 기의-힘은 각각 나름의 실체와 형태를 가진 독립된 실재가 된다. 그리하여 에코의 입장을 채택하는 경우, 기표는 나름의 다의적 변주를, 기의도 나름의 변주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다른 차원에서 지시하는 중첩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프란츠 바르돈이 지적한 것처럼, 영상 숫자 빛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다양하게 중첩되어 확장된다. 이것이 곧 세 번째 로고스이자 형상화를 거친 자연의 언어다.


(4) 다의성으로서의 상징

이처럼 기호는, 수학에서 사용하는 지시 부호(수학 부호)나 규약(합의)으로 제한되는 언어기호까지도 일의적이 아니라 다의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우리의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폐쇄된 하나의 틀(말하자면 수학이나 언어 사전) 안에서라면. 각 기호는 일의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난 다른 맥락에서 모든 기호는 다의적이다. 엄격하게 일의적인 수학 기호조차 그러하다. 오컬티스트들은 물론이고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하나의 수 체계에서 비롯된 하나의 <수-기호>가 얼마나 다양하게 형식과 의미를 확장해나가는지 알고 있다.

이처럼 기호가 의미를 확장해 다의적이 되도록 하는 메카니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우선 기호 즉 지시물이 지시하는 대상의 특성에 기인한다. 즉, 기호는 전항(前項) 즉 전 단계의 특정 측면을 가리키는 창조-모방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기호 표현과 기호 의미가 각각 형태와 실체를 가지고 전방위적으로 전항의 힘을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번째 로고스다. 또한 이 기호는 연상 또는 추론을 일으켜 창조-모방의 역방향으로 전항의 전체를 재구성하는 작업 도구로 쓰인다.

예를 들어, 물질 행성인 ‘금성’을 가리키는 <금성>이라는 단어는 물질 우주의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다. 천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라면, <금성>이라는 기호는 단 하나의 사물만 지칭하는 일의적 지시물이다. 그러나 맥락이 열리는 순간 <금성>이라는 기호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얹혀지기 일쑤다. 고대로부터 <금성>이라는 기호는, 그 찬란한 빛과 새벽과 저녁을 오가는 특이성 등 때문에 찬란한 사랑, 에로틱 등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점성학이나 연금술 등 오컬트 학문의 맥락에 편입되면, <금성>은 상위 계의 특정한 힘을 표상하는 상징물로 재탄생하여 전항, 즉 상위 계의 그 힘을 반영-모방하는 지시물이 된다. 물질 금성이 가진 속성이 전항의 그 힘(원인)과 부분적으로 상응하는(결과)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천문학 이전에 점성학에서 이 상응성을 고려해 창조-모방한 기호이므로, 그 유추 과정의 원천은 점성학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상응성이란 물론 소리나 모양의 모방을 포함하겠지만, 규범론적 언어학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형상의 모방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창조-모방의 초점은 원인적 차원의 힘이 운동을 통해 어떻게 나뉘고 결합하는지에 모아져 있다.)

그 이후 <금성>이라는 기호는 기의와 기표 차원에서 각각 독립적인 다의성을 확보했으며, 매우 단순한 도상적 기호에서부터 시적 상징, 종교적 상징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기의와 기표는 서로 중첩되며 상위 차원의 힘, 즉 전체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호는 부분이므로 전항의 그 힘 전체를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상화 과정을 거쳐 그 힘 전체를 유추할 수 있게 하며, 상응 목록이 쌓일수록 지시하는 ‘전체’의 ‘부분’도 확장될 터이다.

이와 같이 기호의 구조가 확장되는 경우, 모든 기호는 상징의 다른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아바탸노의 <철학사전>이 규정한 것처럼, “모든 사물과 사건”이 전항의 어떤 측면을 가리키는 지시물로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중세 스콜라 학파의 상징주의처럼 “우주는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은 사물이라는 기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을 매개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그래서 성서의 모든 사건과 기호를 “철저하게 일의적으로 읽어야 한다(토마스 아퀴나스)”고 결론 내린다면, 또는 범기호학의 주장처럼 “스스로를 의미하는 전체로서의 우주, 즉 만물 단위의 의미만이 지배한다(파졸리니)”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될 것이다.

(5) 정신의 구조와 상징

그러나 두 번째 로고스 즉 창조-모방 작업을 통해 기호-상징의 지위를 얻은 기호라 해도, 그것이 세 번째 로고스로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자연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해도, 어떤 맥락에 얹혀져 해석되지 않으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네 번째 로고스, 즉 해석 작업을 통해 유추하는 인간 정신이 여기 결부됨으로써 진정한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츠 바르돈은 앞서 1장에서 인용한 구절을 통해 “오컬트 유추가 4극 자석과 상응”한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이렇게 엄청난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어떻게 인간은 기호를 만들 수 있으며, 기호를 해석할 수 있는가? 기호 특히 언어체계는 우리의 정신구조와 동일한가? 이 우주가 신의 말씀이자 언어의 표상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상징인가? 그렇다면 단일한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하는가? 그 해석은 우주에 가장 안정적인 하나의 합법칙성만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로크와 흄과 버클리를 거치면서 결국, “지각적 시니피에의 개념을 기호 현상의 결과로서 정의”할 수 있는가? (움베르트 에코, <기호> 222쪽)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헬레니즘 이후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식론과 언어학, 기호학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논쟁이 이루어진 문제다. 우리가 여기서 그 역사적 진행과정을 세세히 들여다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곳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학문적 탐구 여부와 상관 없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원시인에서 고대인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로서 인간 정신을 추상적 관념의 영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왔다. (물론 아무런 추상화 작업 없이, 뜬금없이, 본질로 훌쩍 안내한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다.)

프로이트 이후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가 횡단되었고, 위에서 제기된 문제는 인식론이나 언어학 또는 기호학의 범주 밖에서 수많은 임상 실험을 거쳐 다른 차원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의 정신 즉 멘탈체가 의식-잠재의식의 양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둘의 상호작용에 대해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대 헤르메스학과 카발라 전통에서 명료하게 전개하고 있는 모티프(양극에 걸친 정신 작용)가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의 전통과 함께 심리학의 연구 결과로부터, 앞에서 제기된 기호 해석, 즉 역방향의 창조-모방 작업, 추상적 실재로의 의미화 작업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G.융은 <원형과 무의식> 31~32쪽에서 ‘2차적 주체’라는 명칭으로 당시만 해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던 잠재의식의 실체를 논증하고 있다. 이 논증은 잠재의식(무의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약 의식 내용이 에너지 손실에 따라 의식의 문턱 아래로 들어가서 무의식이 되고, 반대로 에너지 증가에 따라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가능하다면, 무의식적 의지행위가 의식성이 되도록 해주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무의식적 과정은 문턱을 넘어서지 않아서 자아가 인지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융의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무의식이란 의식의 억압에 의해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억압을 해소함으로써 해당 무의식이 에너지를 얻어 의식성을 획득하도록 하는 과정을 치료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융은, 우리의 정신은 원래 이차적 주체를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이는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융의 같은 책 다음 내용을 참고하자.

“그러나 무의식적 과정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고 문턱 아래의 이차적 주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즉, 가설에서는 의식성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양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 주체가 왜 문턱을 넘어서서 원래의 자아의식에 편입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다. … 이차적 주체의 존재는 억압 덕분이 아니며,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의 결과를 표현한다. …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의식화되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양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차적 주체도 자아의식에 영향을 주는데 다만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상징들’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그 표현이 썩 적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의식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우선 징후적symptomatisch(징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에 근거를 두는지 알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는 부호학적semiotisch(기호)이다.” (문장 중 징후, 기호 부분을 제외한 볼드체 부분은 인용자의 표기임. 이 표시는 번역어를 인용자의 의도에 따라 수정하기 위한 것으로, 징후적은 징후로, 부호학적은 기호로 수정함)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자아의식’과 ‘잠재된 이차적 의식’을 가르는 ‘문턱’ 개념이다. 융은 문턱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스펙트럼, 즉 도수 위에 특정 양태의 정신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때 문턱은 각 정신양Psychoide의 경계다. 광도, 즉 스펙트럼 위에 있는 다중적 정신. 이것이 융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출발점이다. 헤르메스학이나 카발라를 공부하는 이에게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우리의 의식 위에 그리고 아래에 다중적인 양태의 정신들이 펼쳐져 있으며 이것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개념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물론 실제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융은 이 전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제시한다.

우선 융은 정신의 해리 현상이 별도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 관계’로서 자아 안에 통합되는 개념임을 강조한다.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자 동시에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면에서는 의식적이며 다른 면에서는 무의식적이다. 모든 모순이 그러하듯이, 위와 같은 사실도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여기에 있고 무의식은 저기에 있다는 식으로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히려 정신은 의식적-무의식적 전체성을 표현한다.” (<원형과 무의식> 63쪽)

경계를 가진 다른 양태이지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 둘은 하나의 다른 양태(모순적인)일 뿐 별개의 자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현상을 ‘자아의 양극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프란츠 바르돈이 명쾌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멘탈적 양극성은 능동적 즉 양(+)인 의식과 수동적 즉 음(-)인 잠재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전기적 흐름과 자기적 흐름이 멘탈 영역의 양극을 대표합니다.”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64쪽)


“생각하는 행위는 질이며 또한 양이기도 합니다.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능동적 영역인 일반적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수동적 영역으로 잠재의식 부분입니다. 의식과 잠재의식은 둘 다 생각하기의 질적 개념에 포함되며, 힘껏 노력하면 그 양이 증가하게 됩니다.” (같은 책 28쪽)


“자아의식은 멘탈계에서 영이 갖는 근본 속성으로, 우주 흙원소가 지닌 양태입니다. … 대뇌의 영역인 의식은 멘탈계와 멘탈체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5쪽)


“잠재의식은 우리의 모든 부정적 속성을 보여주는 거울로, 아스트랄체 안의 간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같은 책 26쪽)

바르돈에 따르면, 우리 영, 즉 멘탈체의 외연을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가 ‘생각하기’의 주체인 의식이며, 이 의식의 반영인 다른 한쪽이 곧 잠재의식이다. 의식은 멘탈계(관념의 세계)에, 잠재의식은 아스트랄계(이미지-형상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양과 음이라는 한 쌍의 실재가 우리 자신이며, 능동적 또는 수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속성의 스펙트럼 위에 포진되어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결국 의식-잠재의식의 한 쌍은 우리의 영-혼-육을 오가며 자신을 드러내는 ‘자아의 양극성’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문턱’이 있다. ‘베일’이라고도 부르는 경계로서, 한 쌍이지만 다른 속성의 운동성을 갖는 각 에너지가 각자 나름의 운동을 할 수 있게 틀을 짓는 ‘매트릭스’다. 사실 흙 원소로서의 자아의식은, 이 매트릭스 자체이기도 하다. 이 매트릭스는 양의 흐름과 음의 흐름을 포괄하는, 말하자면 의식의 모순으로서 잠재의식까지 함께 포괄하는, 모든 운동의 총합이다. 동시에 양과 음의 운동하려는 충동에 따라 매개하고 전달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스펙트럼인가에서 감각을 통해 수용된 정보는 의식-잠재의식에 의해 포착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각각 독립적으로 자신의 운동 영역에서 포착하는 정보들(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을 수용한다. 물론 육체의 의식이 자리잡은 육체 대뇌에서는 시공간으로 제약된 정보를 수용한다. 그러나 아스트랄체 대뇌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정보를 수용한다. 멘탈체는 시공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정보를 수용한다. 잠재의식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는 이전에 한 번도 의식된 일이 없던 문턱 아래의 여러 과정들”이 수용되어 있으며, 이를 가리켜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앞서 상징이라는 기호가 ‘기표-기의’라는 이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은 실체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또한 이들이 서로 중첩되며 다의적으로 확장되는 모습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양극성으로서의 자아의식이 각자의 운동영역에서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며 처리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상징의 해석이라는, 진정한 네 번째 로고스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6) 해석과 환원
 
5장에서 융이 제시한 두 번째 주의해야 할 사항을 살펴 보자. 자아의식의 양극성, 즉 의식과 잠재의식의 상호교류에 대한 문제다. 우리 의식에 포착되는 잠재의식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근거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징조”의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상징 기호”다. 자아의식에 자신의 내용을 드러내는 잠재의식의 형태는 이 둘 중 하나다. 움베르트 에코가 지적했듯이, 징조는 단순한 자극일 뿐으로, 일정한 “연상”작용을 가능하게 할 뿐 해석 과정을 포함하지 않는다. 징조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채 “주관적으로 인식된” 내용이다. 완전한 의식화 과정은 의미와 근거를 알거나 안다고 추정되는 한에서 ‘상징’이라는 기호를 “유추”하는 작업을 통해 일어난다. 꿈에 드러난 잠재의식의 내용은 징조일 뿐, 해석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유추하고, 완전한 의식의 영역에 그 내용을 포괄할 때 기호-상징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은, 의식-잠재의식 즉 양극성(모순)의 통합원리에 걸쳐 있는 자아의식의 작업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예찌라계라는 형상의 세계에 얹혀 있는 의식의 작업 영역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상징은 자연의 언어, 즉 형상의 세계에 속한 힘의 형태다. 따라서 이미지라고 일괄해 표현하는데, 이때의 이미지란 이마고imago, 즉 모방-재현된 형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르돈이 지적했듯이, 영상, 리듬, 숫자, 소리, 색깔, 기호 등이 모두 이마고로서의 상징이다. 힘의 진동이 형상을 입고 드러난 형태들인 것이다. 이 또한 이원항의 결합체로서 기표(실체와 형태)-기의(형태와 실체)의 양극성이 결합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때의 양극성은 관념의 세계나 가장 근원적인 첫 힘의 양극성과는 다른 존재 양식으로 드러난다. 형상의 세계인 예찌라계에 드러난 힘은 자웅동체(암수한몸)가 아니라 양성구유(어지자지)인 것이다. 세계의 ‘첫’인 단일자, 즉 신은 자웅동체로서, 모든 양(남성성, 충동으로서의 힘)과 모든 음(여성성, 충동을 제한하여 형상화하는 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힘이 분화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형상을 입게 될 때, 여기 반영-재현되는 힘은 분화되었던 자신의 극성을 그대로 가진 채 포괄된다. 양성구유가 그것이다. 예찌라계의 양성구유적인 존재양식은 네짜흐와 호드, 그리고 예소드로 표현된다. 다이온 포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네짜흐와 호드)은 하위 차원의 힘과 형상을 대표한다. 네짜흐는 자신들이 낳은 본능과 감정을 나타내며, 호드는 구체화된 정신을 나타낸다. 대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둘은 힘이 형상으로 구체화되는 두 가지 단계를 나타낸다. 네짜흐에서 힘은 아직 비교적 자유로운 운동을 유지하고 있다. 극도로 유동적인 상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 정도로만 묶여 있다. 그러나 호드에서 힘은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일정하고 영구적인 형상을 띠게 된다.  … 네짜흐에서 모든 정신은 집단정신으로서만 존재하지만 호드에서는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 시작된다.” (미스티컬 카발라> 324쪽)

“예소드는 정신과 물질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고유한 실체의 영역이다.” (같은 책 364쪽, 368쪽)

네짜흐와 호드에서 우리의 정신, 의식-잠재의식, 특히 예찌라계와 동일 스펙트럼을 지닌 아스트랄체(혼)이 자연의 힘에 작용한다. 여기서 이미지를 만드는 인간 정신은 “아스트랄 빛이 형상을 띠고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감각할 수 있는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속적 형상으로서 개념화 작업이 나타난다. 예소드의 존재 양식이라는 스펙트럼에 위치한 우리의 혼은 이 이미지를 실체 경험 사물과 연결한다.”


사실 힘-충동인 네짜흐의 존재양식과 형상-틀인 호드의 존재양식은 서로 겹쳐져 극성의 넘나들이가 빈번한 상태로 존재한다. 다이온 포춘은 특히 실천적 측면에서 힘은 호드에서 네짜흐로, 네짜흐에서 호드로 흘러들어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소드는 물질과 정신의 넘나들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존재 양식이다. 바로 여기, 기호-상징의 확장과 해석, 유추 작업의 가능성이 있다. 예찌라계, 그리고 예소드의 매개에 의해 앗시야계에 걸쳐, 기호 자체의 양극성과 우리 정신의 양극성이 상호작용하는 작업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3장의 그림2를 통해 기호가 다중적 확장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살펴 보았다. 자연의 언어인 상징은, 네짜흐 호드 예소드 라는 하위 자연의 존재양식 중 어느 특정한 스펙트럼에 놓여 있다. 그것이 기표의 형태다. 예컨대 숫자는 호드의 스펙트럼에, 리듬은 네짜흐의 스펙트럼에, 사물은 예소드의 스펙트럼에 얹혀 있다. 상응법칙에 따라 이 기호를 만든 누군가는, 이 기호가 가리키는 추상적 실재, 즉 관념의 세계에 배속된 본질과 기호의 동질성을 발견한다. 이 작업은 그의 잠재의식이 기의의 실체와 교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기의의 형태(파동)를 인지하고 기표의 실체와 연결하는 작업은 기호 생산자의 의식화 과정이다. 그의 의식은 기표와 기의를 연결함으로써 양성구유인 특정 기호-상징을 생산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세 번째 로고스 작업인데, 기호 생산자의 임의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로고스라는 규칙에 따른다. 이것이 수체계, 언어체계, 상징체계 등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이 체계는 원형의 세계, 모든것의 모티프가 만들어진 아찔루트계의 분화-통합 모델을 모방한 것이다.

우리의 유추 작업은, 이 과정을 거꾸로 모방 재현한다. 다이온 포춘은 이 과정을 “상징에 정신을 집중하면, 바로 그 힘과 접촉하게 된다”고 묘사한다. “바닷물이 통로를 따라 호수로 쏟아져 들어오”듯, 우리 의식과 우주의 잠재의식 사이에, 그리고 우주의 의식과 우리의 잠재의식 사이에 통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융의 ‘원형적 무의식’은 이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단순 모방에 그친다면, 이를 네 번쨰 로고스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의식-잠재의식의 작용에 따라 기의의 확장은 물론이고 기표의 확장이 이어진다. 우리 안에 프로그래밍된 창조자의 힘이 파생을 거듭하며 창조를 재현하는 셈이다. 잠재의식은 수용된 정보를 바탕으로 기의-기표의 확장을 이어나가며, 의식은 이 둘을 개념화하며 연결시킨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 로고스는 기표-기의의 통합 작업을 통해 ‘관념화’ 과정에 들어선다. 이것이곧 ‘완전한 해석’이며 본질과 만나는 과정이다. 우리 의식-잠재의식, 즉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정신은 예찌라계에 얹혀 있는 작업과정을 거쳐 그것이 표상하는 본질-개념을 도출한다. 또 다른 차원의 의식화 과정인 셈이다. 형상화된 잠재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 말이다.

문제는 잠재의식이 포착해서 축적하는 내용들을 어떻게 의식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란츠 바르돈은 훈련을 통해 잠재의식을 통제함으로써 잠재의식의 내용들을 관념의 창고에 배속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인 유추 작업을 통해 그 통로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조언한다.

훈련은 지난하지만, 일단 상응성을 파악하는 유추 작업의 파일이 쌓이면, 그리고 “하나를 통해 근원으로 환원시켜 같은 속성끼리 분류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섬광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상징으로 본질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오컬트 유추법의 핵심이다.



– 까페 아르고나우트에서, ‘마법아티클’ 칼럼 발췌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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